고난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2016년 12월 8일 목요일
고린도후서 4:1~4:15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경 길라잡이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2절):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었다(2장 17절).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본질적으로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복음 사역은 영광과 성공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모욕의 길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 사역의 본질이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고난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2016년 12월 8일 목요일
바울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초라한 삶이 영광스러운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자들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반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심으로 생명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고난 중에 생명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고난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사역이 부와 영광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헛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교회는 이 단순한 진리를 믿고 가르쳐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말씀 사역이 영광스러움으로 가득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채 회중 앞에서 다스리는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에게는 부와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을 잃어버렸고, 복음은 더 이상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고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화려함과 부귀를 추구하자 십자가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화려함과 부귀는 교회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난의 능력을 믿으며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이 온전히 세상 가운데 드러나도록 기도합시다.
낙심하지 않을 이유 2017년 2월 7일 화요일 (고후 4:1~12)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렇게도 많은 고난을 겪은 이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 전하는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복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고후4:3-6)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복음을 듣는 이에게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 빛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리라는 믿음, 바울에겐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바울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 가운데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고후4:8-9)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바울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바울의 고난과 환난이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해산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이,
복음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열게 했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참됨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바울의 확신 가득한 복음전파의 삶,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기원합니다.
질그릇과 보물 (2018년 7월 5일 목요일)
'질그릇'과 '보물'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질그릇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잇대어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종이 되어주는 삶을 의미하지요.
세상 풍조는 우리에게 질그릇이 아니라,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되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질그릇 같은 삶은 이른바 ‘평범’하지 않고 매우 드뭅니다.
본문은 질그릇과 같은 삶의 모습을 네 가지로 표현해줍니다.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새번역)
이 같은 질그릇의 삶이란 강력한 결단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의 삶은 질그릇에 보물이 담겨있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보물은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담은 질그릇은 낮아짐의 역동성을 표상합니다.
'강력하게 약해지는' 역설적 삶을 의미합니다.
보물을 품은 질그릇의 삶은 모든 시대 모든 신앙인들의 깊은 내면을 대변하는 특성일 것입니다.
시대의 풍조에 묻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품고서 시대의 풍조를 거르스며 살아가는 용감한 질그릇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주님, 우리를 질그릇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안에 보물이 담겨있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바울이 전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5절)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8, 9절)
기도
화려함과 부귀를 추구하는 헛된 마음을 벗어버리게 해주십시오.
고난 중에 십자가를 증언하는 능력이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주셔서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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