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해서’를 넘어 ‘함께’로 2016년 11월 7일 월요일
욥기 5:1~5:27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자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성경 길라잡이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7절):
4장에 이어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성 앞에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전적으로 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8절): 엘리바스는 고난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욥이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17절):
엘리바스는 욥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하지만 엘리바스의 권면을 따라 욥이 이 모든 고난을 자신의 죄 때문으로 돌리면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 된다.
묵상과 삶
구원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을 위한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 3절은 이런 역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는 못했기에 발생한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신학적 지식은 때때로 지체를 죽이는 흉기가 됩니다.
안타깝게도 엘리바스는 과거의 강렬한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든 지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일상적 사귐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하는 말이라도 종종 오해와 갈등을 야기합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하고 바른 말이 도리어 지체를 해하는 것도 일상적 사귐의 부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사귐이라는 그릇 속에서만 제몫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무지한 세상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만들지만,
도리어 그 지식으로 더욱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은 편리함이라는 밝은 면과 더불어 대량살상무기라는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해법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담는 사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적 사귐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보다 중요하고 급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묵상질문
엘리바스의 권면이 욥의 상황에 적절합니까?(8, 17절)
엘리바스의 주장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점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고 한 권면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까?
기도
일상의 중심에 지체들과의 사귐이 있게 해주십시오.
머리로 배운 것들을 사귐 속에서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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