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4]질문하는 참된 신앙 (욥 3:1~26) (CBS)

colorprom 2016. 11. 5. 14:28

질문하는 참된 신앙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욥기 3:1~3:26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열어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 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성경 길라잡이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1절):

칠 일간의 침묵을 깬 것은 욥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이다.

욥이 당한 고통의 근원은 그가 당한 외적 고난이나 육체의 질병, 아내의 시험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욥의 고통은 그가 처한 상황과 그는 믿는 선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발생한다.

욥은 양자를 연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3절):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리워야단(8절)은 바다의 괴물이자 혼돈의 용으로 등장한다(시 104편 26절).

어떤 사람들이 리워야단이 해를 삼켜 일식의 어두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11절):

욥은 극한 긴장에서 발생한 질문을 하나님께 연이어 던지고 있다.

20절부터는 당혹감과 비통함을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이런 질문과 당혹스러움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질문하는 참된 신앙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참된 신앙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의 경우처럼 참된 신앙에는 보이는 현실과 기록된 말씀 사이의 큰 갈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실된 신앙은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직면해본 적이 없는 절실한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며,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반면 맹신은 그 어떤 질문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질문이 없으니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자들만이 그 질문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역사상 등장했던 많은 이단들은 언제나 쉽고 명쾌한 답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삼위일체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많은 자들이 그러했으며,

신비 속에 있는 창조와 종말을 명쾌하게 설명하려 했던 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도 역시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은 우리의 복잡하고도 깊은 절실한 의문을 일으킵니다.

어떤 의문은 평생을 고민해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신앙 그런 신비를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답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대는 하나님을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곁에 있어주기 (2018년 10월 4일 목요일) (욥 3:11~26)


하루 아침에 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소유를 전부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잃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건강도 잃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날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를 위로해줄 친구들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때 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자신에게 그런 고통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왜 하나님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셔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자신의 길을 막으시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은 쓰디쓴 인생을 살아갈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왜 생명을 주신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은 죽음을 부러워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태어나기 전 혹은 태어나면서 죽었어야 했다고 토로합니다.

은 자신의 삶에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고 탄식합니다.

(26, 새번역)


의 고난과 탄식을 묵상하며 혹 지금 우리 주변에 처럼 아파하며 절규하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웃의 고난을 해결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곁에 함께 있어줄 수는 있습니다.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산책자]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타인의 굴욕, 타인의 고통, 타인의 무기력함, 타인의 죽음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므로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아파하신 것처럼, 저희도 고난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욥이 경험하는 고통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기도


답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긴 호흡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