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하]

[11]누가 하나님을 길들이겠습니까? (삼하 6:1~11) (CBS)

colorprom 2016. 5. 13. 16:15

[11]누가 하나님을 길들이겠습니까?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사무엘하 6:1~6:11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성경 길라잡이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2절):

사울은 언약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다윗은 언약궤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할 뿐 아니라,

신앙을 기반으로 지파들을 공고히 결합시키려 했다.

예루살렘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다윗의 왕권도 강화되었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3절): 다윗은 율법(출 25장 14, 15절)대로 궤를 메어 오려 했으나,

오랫동안 언약궤를 보관했던 웃사와 아효는 관례(삼상 6장 7절)대로 언약궤를 수레로 옮겼다.

이는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뜻을 우위에 두는 일이었다.

특히 웃사는 ‘손을 들어’ 언약궤를 붙잡는 노골적인 방식으로 언약궤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었다.

다윗이 분하여(8절): 분노의 대상은 언약궤를 자신의 방식으로 옮기려던 웃사이다.

 

묵상과 삶

 

언약궤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발등상일 뿐,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언약궤를 자신의 수중에 보관한 이들은

언약궤처럼 하나님도 자신의 수중에 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은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시도,

혹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합니다(2계명).

 

이런 우상숭배는 이방인이 아니라 언약백성들이 자주 저지르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명백한 선언과 기적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좁은 견해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두려운 우상숭배는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1)하나님의 복음을 자본과 권력과 같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세속적 가치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기복신앙,

2)사회적 지위와 세력을 위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성공주의 신학이야말로 이 시대의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3)또한 내가 하나님을 믿는 바를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종종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야기합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어떤 특정한 양식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지체가 믿는 바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을 동반합니다.

 

성도들의 사귐 속에서 우리는 한 개인이 경험하는 것보다 더욱 크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다해 섬길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묵상질문

 

다윗의 의도(2절)와 웃사의 의도(3절)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우상숭배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요?

 

기도

 

내 안에 있는 우상을 깨뜨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