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믿음에 따르는 시련 (요한 9:35~41) (CBS)

colorprom 2016. 2. 25. 13:38

믿음에 따르는 시련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요한복음 9:35~9:41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성경 길라잡이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은셨더니(35) :

회당에서의 대화는 일종의 재판이었다. 회당에서 내어 쫓긴 것은 출교의 의미로 이해된다.

그 기간이 며칠인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회당생활로부터의 분리가 선언되었다.(NIV 적용주석 참고)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5-37절):

여기서 ‘만나사’라는 단어는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오는 만남을 의미한다.

소경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묻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알기는 알되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를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

회당에서 출교당한 후에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젊은이는 자신을 보게 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한다(worshiped, NIV). 이는 새로운 예배의 시작을 의미한다.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선언된 후 예수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 우리도 맹인인가(40절):

이 문장은 부정적 의문문으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문장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아직도 자기들을 인간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묵상과 삶

 

보지 못하던 젊은이에게 이 임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익숙한 회당에서의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이 젊은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의 삶을 잃어버린 젊은이는 즉시 자신을 치료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새로운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예배하는 삶에는 시련이 따릅니다.

이전의 삶으로부터 분리되는 아픔, 과거로부터 끊어져 나가는 고통이 없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삶에서 앞을 보는 삶으로 변화된 젊은이는

회당에서의 삶에서 예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시련을 동반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은 시련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단순한 삶을 가르칩니다.

믿는 자의 삶에 따르는 형통의 복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에 주어지는 형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형통이란 아무 어려움 없이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삶을 약속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의 삶에는 고난이 따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경건한 삶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주어지는 형통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란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삶, 그 삶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형통의 삶은 고난과 함께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복을 기대하며 누리는 신자의 삶을 추구하도록 기도합시다.

 

삶으로

 

소경이었던 사람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이 끝난 후,

예수님은 이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리고,

바리새인들의 무지함을 지적하기 위해 다시 찾아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음을 밝힙니다.

그러자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합니다.

비로소 그의 영적인 눈도 뜨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똑같은 말을 듣고서도 도무지 깨우치지 못합니다.

결국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진리도 분별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참으로 이들은 육체의 눈은 뜨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소경인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구원과 심판 사이에는 예수님을 주님과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인데,

이는 마치 소경이 예수님을 믿고 절하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일부러 절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는 종이 주인 또는 왕에게 절하듯 예수님께 절했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필요할 때만 예수님을 찾는,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이나 천국가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하고 믿는다면,

속히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자 구원자이심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묵상질문

 

눈을 뜬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은 무엇인가요(3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39)?

똑같은 말씀을 들었음에도 왜 소경은 예수님을 믿는데, 바리새인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자 구원자인가요? 아니면 그냥 손님인가요?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도

 

하나님, 주를 믿고 따르는 삶 가운데 경험하는 고난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직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고난 중에도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안에 자리한 모든 거짓과 독선, 고집, 자존심이 무너지게 하시고,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 앞에 당당히 서서

오직 주님께만 엎드리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