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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분을 넘어 전체를 보아라! (요한 7:14~24) (CBS)

colorprom 2016. 2. 21. 16:21

[25]부분을 넘어 전체를 보아라!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요한복음 7:14~7:24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성경 길라잡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15절): 예수님께는 다른 이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놀라운 권세가 있었다.

이 권세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타고난 권세가 아니라,

17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심으로써 얻은 권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위하여 사셨고, 사신대로만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 고백했다.

 

배우지 아니하였거늘(15절):

 랍비 밑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뜻인데, 실제로 예수님은 유대 랍비에게서 배운 적이 없었다.


무리(20절): 이 사람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순례자들로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나 그 계획을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군중들과는 다르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21절):

‘한 가지 일’은 5장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자신의 행동이 율법에 합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한 관습을 언급하셨다.

안식일 규정을 담고 있는 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을 고려하면,

안식일의 근본적인 목적창조의 생명과 구원의 자유를 기념하고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동은 이런 목적에 합당하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 너희가 내게 노여워 하느냐(23절):

안식일 법은 남자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과 겹칠 경우, 할례 받는 것을 허용했다.

만약 남자아이가 이렇게 ‘부분적으로’ 치료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왜 성인 남자가 안식일에 ‘완전하게’ 치료되어서는 안 되었을까?

예수님은 이 같은 할례를 전례로 삼아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율법을 관대하게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원래 의도했던 바를 이루신 것이다.

 

묵상과 삶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것은 율법의 형식적인 규정이지 그 율법의 목적인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표적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외면한 채

표적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던 것과 동일한 오류입니다.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 가장 신앙적인 행동이 도리어 가장 불신앙적인 것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와 같이 종종 성경이 나타내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욕망에 합하는 신앙적 행위나 가치만 붙들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자기만의 세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왜곡된 신앙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섬기는 노예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런 왜곡된 신앙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각성하기를 요청하십니다.

신앙을 좀먹는 위협 가운데 하나가 ‘위선’입니다.

신앙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하고 있지만, 정작 그 행동을 하도록 한 처음의 정신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의미 없는 행동의 반복만 있지, 본래 의도된 생명력 가득한 기운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주일성수’입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성수로 과연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있습니까?

그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습니까?

예배만 드리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한 밥상을 누리고 계십니까?

자본의 질서가 아니라 사귐의 힘으로 하루를 보내기 위하여 소비를 자제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처음 정신이 살아있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삶으로

 

주후 1세기에는 랍비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랍비 훈련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자격증은커녕 그 흔한 랍비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유대지도자들이나 랍비의 그것과는 달랐고,

유대지도자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권위와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율법의 본질이나 의미를 모른 채,

자신의 영광만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는 불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말씀대로, 자신의 가르침대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도 이러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묵상질문

 

예수님께 있는 권세의 근원은 무엇입니까?(17절)

그것이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있던 권세와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과 유대인의 주장은 각각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교훈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그 교훈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나요?

 

기도

 

파편화된 신앙을 넘어서 총체적 신앙을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신앙을 재편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며 그것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고,

나아가 그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