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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우리 위를 걸어가소서! (요한 6:16~25) (CBS)

colorprom 2016. 1. 23. 14:57

예수님, 우리 위를 걸어가소서!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요한복음 6:16~6:25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성경 길라잡이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18절):

길이 21km, 폭 13km에 달하는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210m가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언덕과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서편 해안은 600m, 동편 해안은 1,200m에 이른다.

이 같은 갈릴리 바다에는

오후마다 서쪽에서 유입되는 지중해의 시원한 공기와 뜨거운 광야의 공기가 충돌하면서

강한 바람과 폭우를 자주 일으킨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19하반절):

갈릴리 호수 북쪽을 가로지르는 거리는 약 8km인데,

제자들이 약 절반 정도를 건넜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구원사적으로 2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성경에서 바다는 주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반역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으신 것은 그 세력을 제압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둘째, 6장에 연이어 등장하는 오병이어와 바다를 걸으신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상관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셨고, 무리들에게 넉넉한 음식을 주셨다.

유월절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출애굽을 보여주신다.

새로운 출애굽은 단순히 첫 출애굽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이 보여준 구원의 성취이자 완성이다.

 

축사하신(23절): 원뜻은 ‘감사를 표하다’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가버나움(24절):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 갈릴리 호수 북서쪽 연안의 어촌이다.

이곳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 무대 중 한 곳이다.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했고, 세관이 있었다.

베드로의 장모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묵상과 삶

 

넓고 깊은 바다는 그 너비와 깊이가 엄청난 만큼 통제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인간에게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제자들조차 큰 바람과 파도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오심으로써 바다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바다가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대면한 모든 피조물은 모두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세상은 진정한 왕 아래에서 평화를 회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황무지를 걸어가시면 황무지가 동물들이 살만한 동산으로 변하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해 걸으시니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로 변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지나가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립시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걷기 시작합시다.

사람은 세상을 다스릴 주권의 무게와 영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주권을 주장합니다.

경제는 자본의 논리를, 정치는 권력의 정당성을, 문화는 나름의 독자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척한 경제는 탐욕의 도구로 변질되었고, 하나님을 떠난 정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하나님 없는 문화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쾌락으로 점철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바르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십니다.

기독교 신앙운동은 모든 영역에 임하실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는 운동입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한 정치는 겸손한 섬김의 정치이며,

그리스도가 지나가신 경제는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나눔이며,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문화는 더불어 누리는 행복입니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망하며 순종하십시오.

 

삶으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오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위기가 닥치면 우리의 믿음은 크게 흔들립니다.

그렇게 잘 보이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입술에서는 기도조차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마치 숨어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함만 커져갑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해가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큰 풍랑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오히려 죽음의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두려움은 한순간에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늘 우리 곁에서 도우시는 분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주님의 눈은 항상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기에서도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묵상질문

 

첫 출애굽과 요한복음 6장이 어떻게 대응합니까?

오병이어의 표적과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지나가셔야 할 우리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나를 두렵게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

 

두려움과 혼란 가득한 우리의 삶에 함께 계셔 주십시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우러러 따르게 해주십시오.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가셔서 기쁨과 평안을 주신 예수님,

오늘 제게도 찾아오시어 저를 두렵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고,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