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65]확고한 시선, 힘찬 발걸음 (이사 41:1~20) (CBS)

colorprom 2015. 9. 14. 13:49

확고한 시선, 힘찬 발걸음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이사야 41:1~41:20

 

1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2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3 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5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힘을 내라 하고

7 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17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18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성경 길라잡이 

 

섬들아 내 앞에서 잠잠하라(1절):

섬들은 사람이 사는 가장 먼 곳을 가리키기에 ‘섬들과 민족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통치하신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2절):

하나님께서 공의를 이루시기 위해 동방에서 일으키실 사람은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이다(44장 28절).

그가 온 열방을 정복할 것이다(2~3절).

 

2-4절은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를 묻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당시 강력한 제국이었던 앗수르와 바벨론의 신이 아니라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동방의 사람인 ‘고레스 왕’을 불러 세운 것도 ‘나 여호와’(4절)라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각기 이웃을 도우며(6절):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고레스 때문에 모든 열방이 두려움에 떤다.

정치인들은 사기를 진작시키고(6절), 장인들은 우상을 만들지만(7절) 모두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8절):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자들은 역사의 격변 속에서 두려움에 떨 것이나(5~7절, 11~12절)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장애물을 넘어서는 강력한 군대로 거듭난다(15~16절).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한 자가 자신임을 밝히신다.

여기서 ‘네 구속자’라는 말은

‘손해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의 피붙이를 건져주고 구원해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구속자의 예언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던 자들을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20절):

하나님께서 역사적 격변을 일으키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확고한 시선, 힘찬 발걸음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40장 12절부터 31절까지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보편적으로 묘사했다면,

41장 1절부터 20절까지는 구체적인 사건, 즉 바벨론의 멸망과 고레스의 등장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의 역사와 일반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심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일구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두려움에 떨겠지만,

이 사실을 굳게 믿는 자들은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흔들림 없이

정의와 평화를 향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눈앞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앞에서 일비일희하지 마십시오.

주권은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시선을 너무 가까이에 두면 차량의 흔들림이 심합니다.

그러나 시선을 멀리 두면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 깊고 먼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가운데 만대에서(4절) 영원을 바라봅니다. 먼 시선만큼이나 그의 발걸음은 강건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안목은 짧기만 하고, 그 발걸음은 그 두려움만큼이나 불안합니다.

불안을 힘으로 삼는 세상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을 가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걸음을 갈팡질팡하게 합니다.

특히 진학과 졸업, 취업과 결혼, 출산과 육아 같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두 눈을 하나님의 통치에 굳게 고정하고,

힘 있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으로

 

본문은 미래의 대정복자인 고레스 왕의 등장에 대한 예언입니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바벨론을 제거하기 위해 ‘고레스 왕’을 세우시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2절) 바벨론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예언인데,

이것은 한편으로 고레스 왕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

세상의 권세들을 이용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세상의 권세들이 교회를 공격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위한 과정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강대국들까지 사용하신 걸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요 그분의 백성인 교회 또한 강력한 세상의 권세들 앞에서

두려워떨지 않아도 됩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여호와는 우리의 반석과 요새와 방패와 산성”(시 18:2)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권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실 때에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이나 어려움은 우리가 마치 땅 끝에 서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금방이라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합니다.

그리하여 온전하게 서있기조차 힘이 들고 숨쉬기조차 벅찹니다.

절망의 순간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겪었던 나라의 멸망으로 인한 바벨론 포로생활은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타국에강제로 이주하여 살면서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냅니다.

희망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사야 41장 9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땅 끝에서 떨어지려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이라 불러주시고 다시 붙잡아주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그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시고 붙드십니다.

마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모님이 자녀의 이름을 직접 부르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땅 끝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 길모퉁이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버러지 같은 야곱"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허물 많고 쓸모없는 우리도 그렇게 부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과 음성이 우리 손끝에 느껴지고 귓가에 들려지는 편안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함께 깨달음 (2019년 12월 10일 화요일) (14~20)


하나님께서는 야곱"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습니다.(사41:14)

사람을 벌레로 깔보시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야곱)이 자신들을 비참한 존재로 여기며

스스로 버러지 같다고 비하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인간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시대사회적 환경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미화나 비하 없이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만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 '개'에 비유되고 있는 당대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미화나 비하 없이 자기정체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했기에

그 딸이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막7:25-30)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비하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해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사41:15)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비하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십니다.(사41:17-19)

가련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본 무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리가 보고 (…)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사41:20)


그렇습니다.

그때 그들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함께 헤아리며 깨닫는' 무리에 속하는 자가 됩시다.


+ 나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깨닫고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역사적 격변을 맞이하는 열방과 언약백성의 반응은 각각무엇입니까? (5~7절, 10절, 11~12절)

동일한 사건을 두고 다른 반응이 나온 원인은 무엇입니까?

선지자가 말하는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

 

흔들리지 않고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불안해하지 않고, 다른 지체들도 불안하게 만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세상의 권세들 앞에 두려워 떠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시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를 모든 삶 가운데서 부르시고 지키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과 늘 동행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