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사 38:9~22) (CBS)

colorprom 2015. 9. 9. 13:47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2015년 9월 9일 수요일

이사야 38:9~38:22

 

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을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배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의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3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15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16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20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21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22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

 

성경 길라잡이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9절): 10절부터 20절까지의 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10절부터 15절까지는 죽음의 고통, 16절부터 19절까지는 구원의 소망, 20절은 결론적인 믿음의 고백이다.

시의 주제는 하나님께만 생사를 주관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진리이다.

 

스올의 문에(10절): 이는 20절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와 짝을 이룬다.

스올은 사망(18절) 혹은 음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의 위기인데, 그 해결책은 다름 아닌 예배, 곧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다.

시의 시작은 ‘스올의 문에’이지만 시의 마지막은 ‘여호와의 전에서’이다.

죽음과 사망의 문제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을 온전하고 지속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이 같은 개인적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종신토록(20절): 시의 주어가 나에서 ‘우리’로 확장된다.

이는 이 시편이 개인의 고백을 넘어 공동체의 공적 고백으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21절):

왕의 피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무화과 반죽을 사용한 것은 고대의 일반적인 민간요법이다.

 

한 뭉치 무화과를 … 왕이 나으리라(21절): 이는 1절의 ‘살지 못하리라’는 말을 뒤집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5절의 약속과 8절의 기적, 그리고 본 절의 무화과 약을 치유의 징표로 받았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22절):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닫힌 마음으로 불신하여 징조를 거부했었다(7:12).

그런데 지금 히스기야 또한 두 마음으로 불신하여 이미 주어진 것 이상의 징조를 구하고 있다.

 

묵상과 삶

 

히스기야의 시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마지막 내용은 생명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전환점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17절),

하나님께 온전히 엎드리는 것(20절)이었습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깨달음과 예배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공동체가 하는 고백이며,

성경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 즉 영생은 그저 영원히 사는 것을 넘어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17: 3). 우리에게 진정한 영생이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바로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 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세상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고대의 로마제국이나 일제식민지 시대의 조선총독부는 황제숭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예배의 대상을 바꾸려 했습니다.

또한 예배를 어설픈 자기만족과 자아숭배로 왜곡하려는 시도들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시도의 목적은 하나, 즉 예배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예배를 위한 교회봉사가 과도하여 오히려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예배가 무력해지면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함께 무력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무릎 꿇은 예배에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예배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것이 영생의 첫걸음입니다.

 

삶으로

 

히스기야가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에서 가장 한탄한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살아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하신 결과라 믿고,

이로 인해 슬피 울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질병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시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마지막에는 오직 하나님 외에 도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런 고통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산 자는 마땅히 여호와를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같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가 병에서 나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면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주시는 평안을 지향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겠다는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출 15:26).

그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요 11:25).

의로운 태양으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십니다 (말 4:2).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리를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구할 때마다 응답하시고 치유하실 것입니다.

 

나는 내 삶에 개입하시어 구원하신 하나님께 어떠한 노래로 감사하고 있나요?

 

묵상질문

 

영생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히스기야의 시가 고백하는 ‘생명’은 무엇입니까?(20절)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노래에서 가장 감동되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향하고 있나요?

 

기도

 

변질된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예배의 회복을 통해 신자가 신자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해주십시오.

 

나의 생명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게 하시고,

생명이 있는 동안에 늘 겸손하고 하나님만 높이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