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쓰이고도 심판을 받는 어리석은 자들 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이사야 10:5~10:19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그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성경 길라잡이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 :
여기서 ‘진노’와 ‘분노’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기 위한 막대기로 앗수르를 택하셨다.
이로써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축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다.
선지자는 앗수르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범죄한 나라들을 심판할 목적으로 일으켜 사용하셨지만,
앗수르는 스스로 악에 치우쳐 하나님의 뜻과 달리 자만하고 교만에 취해 열국을 짓밟았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셨지만,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 결과 앗수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8절):
앗수르 왕은 마치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교만한 행동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였다.
내 손이 … 뛰어났느니라(10절):
앗수르는 그들의 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다고 조롱한다.
곧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막대기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묵상과 삶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신 나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된 나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 사용하셨지만,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이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다는 자만심에 취해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뽐냈으며,
정복한 나라에서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 대신 폭정과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그 결과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인다고 해서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겸손히 하나님만을 드러내지 않다가는, 반대로 심판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와 교회 건설의 사명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품으신 뜻과 같은 뜻으로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인간적 욕망을 품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 대가로 세속의 복을 얻고자 하는 야망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건설해놓고 그곳에 자신의 왕국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도처에서 보고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드러나지 않으며, 교회 건설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이 가득합니다.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이와 같은 섬김은 앗수르의 결말처럼 심판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앗수르의 실패를 교훈으로 마음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삶으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를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앗수르를 선택하셨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이방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매우 굴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그들의 죄가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강대국으로서 교만히 행하며 약소국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다른 도구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 16:5).
왜냐하면 교만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 이유이기도 했던 만큼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뿌리 깊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물론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된 앗수르와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도
결국 이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은 은근히 교만을 좋은 덕목에 놓는 것 같습니다.
성공한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성공은 모두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교만도 자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날처럼
성공이 도구가 아니라 특권이 될 때 거기에 교만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 하나님의 뜻과 앗수르의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6, 7절)
- 앗수르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요?(13절)
-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 나의 관심은 성공인가요? 하나님인가요?
- 성공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임을 믿나요?
기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에 우리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해주십시오.
거짓되고 세속적인 모든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땅의 교회를 새롭게 해주십시오.
성공한 자에게 모든 특권과 영광을 돌리는 사회 속에서
성공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자리하게 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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