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2015년 6월 3일 수요일
마태복음 23:23~23: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성경 길라잡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23상반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규정을 철저히 지키고자,
앞마당에서 채취하는 적은 양의 약초들 중에서도 십일조를 바쳤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꼼꼼함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으셨다.
박하는 유월절에 쓴 나물의 양념이나 회당의 방향제로 쓰였고,
회향은 미나리와 비슷한 식물로서 조미료로 사용되었다.
근채는 ‘구민초’라고도 불리는 식물인데, 역시 조미료나 약품으로 쓰였다.
율법의 형식에만 치우친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것들이 사용되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23하반절):
구약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의와 긍휼, 믿음’을 세우는 장치였다.
십분의 일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며,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웃을 향한 긍휼을 실천했다.
또한 이런 나눔을 통해 이스라엘이 더 정의로운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는 정의를 일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특권을 강화시키는 권력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가 율법의 겉껍질을 비유한 것이라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율법의 알맹이와 같다고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26절):
25절의 넷째 화와 27절의 다섯 째 화는 모두 겉은 아름답게 꾸미지만 속은 더러운 외식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묵상과 삶
칼빈은 [기독교강요] 에서 교회의 재정사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교회의 수입이 4 가지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한 부분은 성직자를 위하여,
한 부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세 번째 부분은 교회의 여러 건물들의 수리를 위하여,
그리고 네 번째 부분은 해외와 국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되었다.”
재정의 절반 이상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줌으로써
돈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지배가 아닌 긍휼을,
부익부빈익빈의 불의가 아닌 더불어 사는 정의를 일구는 것이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의 정신입니다.
자본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언합니다.
사람이 돈을 정당하게 다스리지 못할 때, 돈이 사람을 불의하게 다스립니다.
돈이 비대해지고 거대해진 결과 ‘맘몬’(우상이 된 돈)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든 것이지 돈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돈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 힘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미쳐서 많은 교회들에서는 재정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듯 헌금을 드립니다.
우리가 탐욕에서 해방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돈도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을 따라 돈을 내주는 ‘믿음과 긍휼과 정의’의 고백입니다.
당장 지갑에 있는 돈을 꺼내어 마땅히 섬겨야 할 사람에게 내주십시오.
그 자리에 믿음과 긍휼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매우 잘 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중심은 전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정의를 행하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을 향해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율법의 중요한 의미와 목적은 잊어버린 채 명목상의 행위만 지키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런 행위에는 정의도, 사랑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교조주의’ (敎條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내용물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 바깥 틀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이 바깥 틀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정작 그 안의 내용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급기야 그것을 모두 쏟아버리는 어이없는 현상을 말합니다.
가령 명화를 돋보이게 하려고 좋은 액자틀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액자틀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정작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이 어느 순간 이러한 교조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묵상질문
- 재정 사용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입니까?
- 어제 하루 사용한 재정의 용도와 목적을 정리해봅시다.
정리한 돈의 흐름을 통해 드러난 것은 세상 나라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 율법을 잘 지킨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나의 중심이 늘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
+ 돈을 따라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 주위에 있는 가난한 자를 알아보는 눈과 재정을 내주는 사랑이 있게 해주십시오.
+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보다 하나님께 좋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게 하시고,
나아가 그것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중심이 바로설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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