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창-17]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복음입니다 /창 11:27~12:9 (CBS)

colorprom 2014. 1. 22. 12:47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복음입니다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창세기 11:27~12:9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205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하란을 떠날 때에 75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성경 길라잡이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27절):

11장 27절부터 32절까지는 데라의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소개한다.

부모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아픔이 있다. 가족의 미래를 이어갈 자녀가 없다.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문제로 가족이 분열되었다.

또한 데라는 마지막 경계선인 하란에서 여정을 중단했다.

과거와 완전히 작별하지도, 미래와 온전히 조우하지도 못한 정황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1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정착할 땅과, 생명을 이어갈 자손과, 복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이미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단절되는 것을 전제한다.

잃어버리는 것은 즉각적이지만, 얻는 것은 약속이다.

그 사이에서 긴장이 발생했지만, 아브람은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복음입니다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참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맹신(盲信)입니다.

즉 참된 믿음에는 의심을 일으키는 긴장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경우 잃어버리는 것은 즉각적인 데 반해, 얻는 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신앙의 여정을 시작한 것은 자신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께서 복음이십니다.

신앙은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 칼은 자신을 부인하는 칼이 될 수도, 타인을 살해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양자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외양이 본질을 구현하지 못할 때,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아브람의 만남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벽을 넘어서는 사귐입니다.

깊은 사귐의 힘이 있었기에 아브람은 긴장 속에서도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귐 없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벽을 넘는 사귐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은 이익과 권력을 동기로 거짓된 사귐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벽을 넘어서는 사귐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명분으로 벽을 둘러친 집단을 형성하지,

벽을 넘어서는 사귐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세상이 권력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장벽을 넘는 사귐입니다.

경제력의 차이와 학벌을 뛰어넘는 사귐입니다.

 

우리의 사귐을 정직하게 반추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익과 권력을 위해 우리와 사귀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익과 권력을 위해 다른 이들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한 해를 믿음으로 2016년 1월 1일 금요일 (창 12:1~7)


새해 첫날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간 첫 사람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2016년 새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고백을 하며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어떤 교리나 성경의 객관적 사실이나 내용을 믿는다는 차원은 아닐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 속에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예수님께 내 마음 전체를 바칩니다.

나는 성령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성령님께 내 마음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헌신하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과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집을 떠나 새로운 인생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은총과 능력을 믿지 않고서는 선택할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2016년 한 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올 한 해를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복이 될지라 2017년 5월 11일 목요일 (창 12:1~3)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 네게 복을 주어 (…)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복인이 되게 해주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살았던 곳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람의 조상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여호수아도 이렇게 말했지요.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 데라가 강 저편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며 가치없이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에서 '복'(히브리어 '베라카')은 '복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현대인의 성경은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지요.

이 복은 이를테면 물과 같은 복입니다.

물은 근원에서 시작되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많은 생물을 살게 합니다.

흐르는 물을 통해 식물이 자라고 동물이 자라, 생명세계가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물과 같은 복'을 내려주십니다.

물처럼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십니다.


복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건 나 혼자 복을 넘치도록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단을 쌓은 아브람 (2018년 1월 22일 월요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람하란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창12:5)

그와 그의 일행은 장기간의 여행으로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더구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늘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길 떠나기 전에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해주시겠다 하셨는데,(창12:2-3)

이번에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창12:7)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아브람 일행과 계속 동행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세겜, 베델 동쪽 산간지역, 네겝 등) 여러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던 이유는,

(창12:7-8) 추측컨대 아마 원주민과의 마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자신이 도착한 지역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구약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여행길에서 잠자리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그곳에 이미 거주해 살던 사람들의 경계의 눈빛이 차갑게 와닿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같은 유랑생활 속에서도 예배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흔히 인생을 여정에 은유합니다. 유랑의 길, 여행길인 것이죠.

때로 고난을 당하거나 때로 아프며, 집주인 때문에 서둘러 이사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를 언제나 갖출 수 있기 바랍니다.


+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인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너는 복이 될지라 (2018년 5월 25일 금요일) (창 12:1~9)


"내가 너(아브라함)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창12:2-3,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제부터 자신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보응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며,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굳이 궁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응과 복수 모두 하나님께 믿고 맡기면 되었습니다.


베드로고넬료의 가정에 방문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는 주님을 환대하듯 베드로를 영접했습니다.(행10:23-44)

그때 그의 가정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베드로를 환대한 고넬료베드로에게 보답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성령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환대한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베드로를 환대한 사람은 하나님께 성령을 받았습니다.


나를 환대한 사람이 복을 받도록, 아브라함 같은 사람,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됩시다.


+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면서 아브람이 즉각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긴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을까요?

 

 

- 하나님과 깊게 사귀는 일이 복음임을 알고, 복음을 누리게 하소서.
- 지체들과 깊은 사귐을 누림으로써 복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주 하나님, 새해 새날을 열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 365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하오니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소서. 아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 각박한 이 시대에

우리가 이웃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주시는 소망과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