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스크랩]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크 /(횃불70)

colorprom 2013. 5. 29. 11:11

(*)빅터 프랭크 =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온 유대인 정신과의사로 

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을 창안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수용소에서 쌀쌀한 늦가을에 샤워를 하고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단체로 여러 시간 밖에 서 있는 벌을 받았어도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셔츠 한벌을 가지고 반년동안 입었고, 수도관이 얼어

세수는 고사하고 손하나 제대로 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 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

 

수면부족,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수용소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다. 

즉, 극단의 환경에서도 그 환경에 압도당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이지

환경의 영향이 아닌 것이다.

 

   시련의 의미

 

모든 것이 박탈된 수용소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되느냐 아니면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의 존엄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느냐 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지고

그 결정은 인간이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실존적 공허

 

실존적 공허는 20세기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현상중 하나로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 겪어야 했던 두가지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러므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둘째는 근래 들어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된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는 본능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어서

때로 우리는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현대에 만연한 우울증,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에는 실존적 공허가 있으며

실존적 공허는 권력이나 돈, 성에 대한 탐닉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수용소에서는 언제 석방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사람-실직자도 비슷한 처지-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 없다.  

그는 정상적 삶을 누리는 사람과 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이러한 행위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됨으로써

삶의 의지를 잃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되어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인간의 정신상태(용기희망)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고,

이루어야 할 목적이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곧 파멸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안는 것을 의미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생(삶)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그에게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그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삶의 의미

 

인간은 추상적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에게만 유일한, 구체적으로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삶의 의미는 ①어떤 일을 하거나, ②어떤 경험을 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③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하므로써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기 위한 좋은 방법은,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와 대면하게 된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는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장면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겠지만,

이 최종적인 의미는 살면서 경험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사랑의 의미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시련의 의미

 

의약품 개발을 위한 시험용 원숭이는 끊임없이 주사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겪어도

원숭이의 지능으로는 인간의 세계, 즉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세계속으로 들어 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삼라만상의 진화과정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서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차원의 세계에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시련의 절대적인 의미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의미를 찾는 데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기꺼이 시련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시련을 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된다.

 

비극속에서의 낙관

 

유럽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 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서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유가 필요한 것은 웃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  즉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그를 웃겨야 하지

웃음을 강요해서는 진정한 웃음을 끌어낼 수는 없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행복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하면

언젠가는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