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박종호] 러시아의 침략에 분개한 쇼팽, 조국을 향한 격정을 음악에 담다

colorprom 2022. 3. 23. 13:54

[박종호의 문화一流]

러시아의 침략에 분개한 쇼팽, 조국을 향한 격정을 음악에 담다

 

바르샤바 함락에 끓어오르는 분노 담아 ‘혁명’ 부제 에튀드 작곡
파리서 숨지자 “마음은 폴란드인, 재능은 세계시민” 기사 실려
유언에 따라 심장은 고국 폴란드에… 수도 공항은 쇼팽으로 명명

 

입력 2022.03.23 03:00
 

프리데리크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1810∼1849)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일 것이다.

학교 음악실이나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걸린 쇼팽의 얼굴은 예민하고 유약해 보인다.

어떤 아이들은 여자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쇼팽의 유명한 특징이다.

 

그는 우아한 행동과 기품 있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고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보기를 좋아했다.

대중 공연장보다는 귀부인들이 주도하는 살롱에서 연주했다.

그가 쓴 피아노곡은 듣는 이의 마음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듯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쇼팽의 한 면일 뿐이다.

그는 젊어서 조국을 떠난 후에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울분을 가슴에 삭이고 있었으며,

평생 친구와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통받은 난민이었다.

그의 음악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회한을 용암처럼 담은 뜨거운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 작곡가 쇼팽은 예민하고 유약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에는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었던 회한과 그리움 등이 담겨 있다.
사진은 라지비우 공작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을 그린 19세기 후반 작품.
오른쪽 위 사진은 프랑스 파리의 쇼팽 무덤이고, 아래는 쇼팽의 슈투트가르트 일기와 초상화다.
쇼팽의 심장은 사후 폴란드로 옮겨져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위키피디아

 

쇼팽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20세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파리에서 죽었다.

 

어린 쇼팽은 일찍이 피아노에 커다란 재능을 보였다.

당시 바르샤바의 신문은 “천재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우리 폴란드에서도 천재가 등장했다”고 쓸 정도였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쇼팽은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먼저 음악의 중심지 으로 가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1830년 에 도착하자마자 쇼팽

조국 폴란드에서 침략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등 강대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외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고유의 예술과 문화를 지켜온 문화국이다.

 

까지 따라왔던 친구는 그 소식에 폴란드로 돌아갔다.

쇼팽은 폴란드의 또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자네가 전쟁터에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네. 참호는 파보았는가? 부디 대령이 되어 돌아오게.

나는 최소한 북치기라도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쇼팽은 자신도 돌아가 전쟁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부모와 주변의 만류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그의 주변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은 유일한 청년이 되었다.

 

을 떠난 쇼팽은 린츠, 잘츠부르크, 뮌헨을 거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쇼팽조국의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받는다.

러시아 군대가 바르샤바를 장악하여 도시를 방화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참담한 심정의 쇼팽은 1831년 9월, 호텔 방에서 일기를 쓰는데,

사후에 출판되어 ‘슈투트가르트 일기’로 알려진 글이다.

 

“오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존재하시면서 복수해주지 않으십니까!

러시아인들의 만행이 아직도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하느님 당신이 러시아인입니까?

아버지는 노년에 빵조차 사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이미 죽은 딸의 무덤을 러시아군이 짓밟은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누이들은 이미 겁탈당했을지 모릅니다.

러시아인들이 시민들을 목 졸라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손으로 한숨만 쉬면서 절망감을 피아노에 두드려대고 있습니다.

 

하느님, 땅을 흔들어 이 땅을 삼키소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지 않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잔인한 고초를 받게 하소서….”

 

그러고 쇼팽은 호텔 방에서 조국을 향해 끓어오르는 격정을

혁명’이라는 부제를 단 에튀드(연습곡) c단조(작품 번호 10-12)로 작곡한다.

 

이어 파리로 간 쇼팽은 그곳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파리의 모든 피아니스트를 굴복시켜, 파리 전체가 그의 연주에 넋을 잃었다.

그는 파리의 최고 명사가 되고,

낭만주의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지금도 따라다니는 그의 연애 이야기는 모두 생략한다.

그런 흥밋거리 일화가 우리가 쇼팽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해왔다.

그보다는 그의 음악 속에 언제나 존재했던 사랑하는 조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목하자.

파리에서 그와 친분을 나누었던 리스트

“보통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거나 고백하는 말을 그는 음악으로 쏟아냈다”고 말했다.

 

파리에서 병을 얻은 쇼팽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39세에 숨을 거둔다.

평생 파리에서 작곡하고 파리에서 연주하다가 파리에서 죽었지만,

그의 부고를 실은 폴란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태생은 바르샤바고, 마음은 폴란드인이며, 재능에 관해서는 세계시민인 쇼팽은….”

 

죽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나의 불쌍한 어머니”였다.

 

파리에서 장례식이 끝나자, 유언에 따라 심장이 도려내졌다.

심장은 주인을 대신하여 조국으로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시대와 조국을 외면한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술은 아름다운 레이스나 화려한 벨벳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폭탄과 화염 속에서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쇼팽의 애국심을 알기에 폴란드 정부는

나라 관문을 ‘바르샤바 프레데리크 쇼팽 공항’으로 명명하였다.

 

당시와 무척이나 닮은 일이 폴란드의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

쇼팽을 계승하는 20세기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들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 블라디미르 호로비치, 에밀 길렐스 등을 지금도 간혹 러시아 사람으로 알지만,

그들은 모두 조국이 짓밟힌 우크라이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