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나는 키예프 시민입니다”

colorprom 2022. 3. 1. 14:00

[태평로] “나는 키예프 시민입니다”

 

입력 2022.03.01 03:00
 
 
2월 26일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시민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항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의외의 주목을 받은 인물은

유엔 주재 케냐대사였다.

 

케냐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60위권의 나라.

이 나라의 마틴 키마니 주유엔 대사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케냐의 국경은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어졌다며

“만약 우리가 독립할 때 민족, 인종, 종교적 동질성에 기반해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면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물려받은 국경을 유지하기로 합의,

위험한 향수를 품고 과거로 돌아가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편을 선택했다”며

러시아도 국경과 국제법을 존중하라푸틴을 직격(直擊)했다.

 

약소국 외교관이 소신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명백히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발언은 세계 경제 10위권인 한국의 대응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 후, 문재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존 및 독립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비판 여론이 일어 국제 제재에 동참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그것뿐이었다.

 

한국은 미국이 앞장서서 EU, 영국 등 동맹국들과 함께 러시아의 달러 결제망을 끊고,

푸틴을 제재하는 데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일본이 러시아 대사를 불러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고

‘침공 중단과 러시아군의 철수’를 구체적으로 요구할 때 바라만 봤다.

 

오죽하면 미국의 전직 고위 관리가 공개적으로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러시아) 접근이 부끄럽고 어리석다”고 했을까.

 

문재인 정권이 진정 인권을 소중히 하는 진보 세력이고, ‘촛불 정권’이라면

누구보다 더 이번 사태의 문제점을 지적했어야 하지 않나.

이럴 때 러시아의 눈치를 본다고 해서 푸틴이 우리를 배려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백치(白痴) 수준의 사고 아닌가.

 

지난주에 만난 전직 외교부 장관은

문 정부의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을 이렇게 개탄했다.

“대한민국이 트루먼 미 대통령의 6·25 참전 결단과 유엔 지원으로 살아난 것 아니냐.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비에 적힌 대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파병된 외국 군인들 때문에

회생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다른 자리에서 만난 전직 외교부 차관급 인사는

재임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가 외교부에 왔을 때 책상을 10번 내리쳐가며 질책한

경험을 들려줬다.

“국제법에 기반해 정당하게 항의할 게 있을 때는 반드시 해 놓아야 한다. 그게 외교

라고 했다.

 

푸틴이 ‘21세기 히틀러’가 돼 평화를 짓밟는 행동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에서 시작된 대규모 반전 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서베를린 방문 당시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명연설을 했다.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베를린 시민”이라는 말로

동독, 소련에 맞서 서독을 돕겠다는 강한 연대의식을 표명했다.

 

이후 이 말은 수차례 변형되며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지원과 협력을 밝히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오는 9일 대통령 선거는

유럽에서 포탄이 날아다니고 3차 세계 대전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위기 상황에서

실시된다.

 

대선에서 “나는 키예프 시민입니다”라는 연대 의식이 확산하고,

대통령 선택 기준의 하나가 될 때

대한민국은 더 굳건해지고, 국격은 한 단계 상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