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지우지 않고 남겨둔 점

colorprom 2022. 2. 28. 14:40

[밀레니얼 톡] 지우지 않고 남겨둔 점

 

입력 2022.02.28 03:00
 
 

어르신들이 듣기에는 우스울지 몰라도 가끔은 내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다.

발랄하다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내가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다니.

그보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한결같이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전과는 달리 살아 보고 싶은 마음에 안 하던 짓을 하나씩 해 보는 요즘이다.

 

하기 싫어 죽겠지만 매일 아침 영어 공부를 하고,

이틀 걸러 한 번씩 먹던 맥주와 마라탕도 끊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어제보다 오늘 조금은 더 똑똑해지고,

약간은 더 건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프로필 사진을 찍으려 사진관을 예약한 것도 이유가 같다.

여태까지는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셀카’를 프로필 사진 삼아 왔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사진은 달라도 뭔가 다르리라.

 

내가 찾아간 스튜디오는 증명 사진을 10분이면 완성해 준다는 사진관보다

몇 곱절은 비싼 곳이었다.

사진가는 응당 10분의 몇 곱절이 되는 시간을 나에게 쏟으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촬영한 끝에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커다란 모니터에 고화질 사진이 수십 장 떠올랐다.

전문가가 찍은 사진은 달라도 정말 달랐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보이지 않던 주름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내가 20대일 적,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여자가 서른이 넘으면 제아무리 의사 변호사라도 쭈글쭈글 ‘쭈그렁방탱이’가 돼서

선을 봐도 재취 자리밖에 안 들어온다고 말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내뱉는 아버지에게 치가 떨렸다.

그러나 모니터 속 쭈그렁방탱이 같은 나의 얼굴을 마주한 후 비로소 깨달았다.

내 아버지는 그저 묘사의 달인이었음을.

 

충격에 휩싸인 나는 키보드 방향 키를 이리저리 넘기며

그나마 덜 쭈그러져 보이는 사진을 찾아 헤맸다.

사진가는 그런 속도 모르는 채 개중 제일 쭈그러진 사진에 표를 던졌다.

 

얼굴을 종횡하는 주름에 풀 죽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하는 내게 그가 답했다.

“‘로버트 드 니로’라는 배우 아시죠? 제가 놀란 게 뭐냐면요,

그 사람 볼에 엄청 큰 사마귀가 있는데 그걸 안 빼더라고요.”

 

그러고는 노벨상 수상자의 사진은 보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이어 하더니만,

잘난 척하는 주변인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면 찍소리도 못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자연스러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힘이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흉측한 나의 주름 사이에도 그러한 힘이 숨어 있을까.

내 눈에는 당최 보이지 않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는 원래의 인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보정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주름을 살짝 옅게 하고 점도 싹싹 빼내는 그의 솜씨가 여느 피부과 의사 못지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던 마우스 커서가 오른쪽 볼에 있는 점에서 멈췄다.

“이건 안 건드릴게요. 이런 거 하나 남겨 놔야 자연스럽잖아요.”

 

완성된 사진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길,

봉투 속에 든 사진을 몇 번이고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우지 않고 남겨둔 점이

로버트 드 니로의 사마귀와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처럼 멋진 사람이 되라는 사진가의 응원은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해 본다.

 

낯설기만 했던 주름진 얼굴이 점점 익숙해진다.

철부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어제보다 오늘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