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238] 기억과 추억
갑자기 떠나고 싶을 때,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아무 버스나 탄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뒷자리에 앉아 동네 이름이 붙은 노래를 들으며 짧은 여행을 한다.
도착하는 곳은 주로 오래된 주택들이 남아있는 동네다.
‘루시드 폴’의 ‘삼청동’이나 ‘재주소년’의 ‘명륜동’ 같은 노래를 들으며
동네 여기저기를 걷는다.
동네 이름이 붙은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동물원의 ‘혜화동’이다.
혜화역 3번 출구. 서울대학교 병원을 통과해 소방서를 지나면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붉은색 벽돌 건물이 있었다.
20년 전,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4층을 걸어 올라가
‘LIBRO’라고 적힌 초록색 푯말을 멍하게 바라봤었다.
그때는 그게 라틴어고 ‘책’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건물에서 나는 한동안 서점 직원으로 일했다.
오래된 것이 종종 사라지는 도시,
앞으로 서울의 아파트에서 태어난 유명인과 예술가들의 생가나 작업실 같은 관광 자원은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많이 사라지겠구나 싶어 쓸쓸해졌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돌아가고 싶은 때를 묻는다면 혜화동 시절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점심시간이면 마로니에 공원 앞 티켓 부스에서 직장인들을 위한 할인 연극 티켓을 사고,
퇴근 후에는 학림다방, 파랑새 극장과 샘터사 앞에서 친구를 만나던 때가 그립기 때문이다.
설날에 혜화동 뒷골목을 걸었다.
옛 회사 건물을 바라보니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 실감 났다.
동물원의 노래를 들으며 아무 버스나 타고 하릴없이 뒷좌석에 앉아 떠나는 동네 여행은
그 시절의 나를 호출한다.
“북촌 슈퍼에서 딸기 맛 쭈쭈바를 쪼개서 함께 나눠 먹은 건 너만의 기억이 아니야.
그런 게 추억이지.”
‘추억’에는 ‘함께’라는 부사가 붙어 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잊었던 추억은 종종 친구에 의해 복원된다.
마치 그것이 친구의 존재 이유라는 듯 말이다.
추억과 기억을 나누는 차이는 그리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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