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82] 권력을 얻으면 양심은 사라지는가?
입력 2020.10.21 03:00
- 데이비드슨은 위세 좋게 일어서서 말했다.
“총독이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건 한심한 일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죄악은 죄악이 아닌 것처럼 그가 말했지만,
저런 여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치욕이며
다른 섬으로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워싱턴에 영향력이 있으니
만일 일 처리에 불만이 남는다면 그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 서머싯 몸 ‘비’ 중에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권력과 비리가 무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부동산 투기, 사모 펀드 비리, 권력 남용 등
정치인과 연결된 의혹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건 놀랍다.
국민은 이제 진실이 드러나고 범법자들이 처벌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최고 권력자와 그가 비호하는 전·현직 법무부 장관, 고위 관료들의
태산 같던 혐의가 묻혀버리는 걸 반복해서 보아온 탓이다
‘인간의 굴레’를 쓴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비’는
타인에게는 도덕적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지만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본질을 통렬히 보여준다.
장마 때문에 섬에서 발이 묶인 선교사 데이비드슨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새디가 문란하게 산다며 당국에 고발한다.
그를 원망하던 새디는 감금이 결정되자 겁을 먹고 영혼을 구원해달라며 매달린다.
매일 밤 그녀 방을 찾아가 함께 기도하던 데이비드슨은
어느 날 아침,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모든 정황은 세상을 향한 새디의 절규에 담겨 있다.
“사내들은 다 똑같아. 추악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들!”
윤리적 우월함을 장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작은 죄는 부풀리고 없던 죄도 만들어 남을 단죄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속은 더 추한 법이다.
그래도 데이비드슨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환멸해서 스스로 벌할 만큼의 양심은 남아있었다.
궁금하다. 인간은 힘을 갖게 되면 수치심을 잃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자기 성찰이 없는 자들이 권력에 취해 휘청거리다가 끝내 자멸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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