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의 입] 문대통령 옥죄는 “남매의 한(恨)”
입력 2020.06.25 18:07
갑자기 이런 궁금증이 든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이 30대 남매는
도대체 왜, 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토록 화가 나 있을까.
한때는 서로 같이 헤드 테이블에 앉아 밥 먹고, 술잔 부딪치고, 같이 쇼도 보고 노래도 듣고,
위아래 이가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도 찍고 했던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철천지원수처럼 변했는가.
정확하게 말하면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왜 이토록 분개하고 있을까.
거꾸로 말하면 문 대통령은 왜 김정은·김여정 남매에게 죄지은 사람마냥 절절 매고 있는 것일까.
‘김여정의 상스러운 욕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군사행동 협박’, 그러다 ‘김정은의 보류 결정’,
이것이 6·25 70주년을 맞은 6월 한 달 벌어진 일들의 요약이다.
북한 김씨 왕조와 그 조종을 받는 매체들의 말본새가 워낙 거칠고 상스럽다고 해도,
또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 북한 주민을 간접적으로 윽박지르는 수사법이라고 해도,
지난 6월 17일 김여정이 보인 말투는 이상했다.
본인도 "말 폭탄"이라고 스스로 규정했는데,
분량이 A4용지 7쪽에 이르는 소위 담화문이라는 것은 저주와 비방이 필요 이상으로 가득하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을 향해 "채신머리 역겹게 하고 돌아가니 그 꼴불견 혼자 보기 아깝다"고 했다.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척 병(病)’ 걸렸다고 한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을 아예 ‘척 병 환자’ 취급했다. 문 대통령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이크 앞에만 서면 온갖 잘난 척, 정의로운 척, 원칙적인 척" 한다고 했다.
한 고위급 탈북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매의 한(恨)이 서린 듯하다."
작년 2월,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하러 가는 도중에
김정은 위원장은 서울로 3차례나 전화를 걸어서 묻고 또 물었다고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은 밝히고 있다.
그가 인용한 문장을 옮겨보면 이렇다.
"하노이로 향하는 전용 열차 안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서울로 3차례 전화를 걸었다.
‘영변만 내놓으면 틀림없는 거냐’며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워싱턴의 전략과 분위기를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에 캐물은 것이다."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영변’이란
평안북도 남동쪽에 있는 영변 우라늄 농축시설, 그리고 영변 핵연료봉 제조 공장 등을 말한다.
‘영변만 내놓으면’이란 뜻은, 다른 핵 제조 의심 지역 말고,
오로지 영변 핵시설만 사찰을 받은 뒤 파괴하겠다는 약속을 하면 되는 거냐, 그런 의미다.
그 당시 미국 NYT·WP 같은 신문은
평양에서 가까운 ‘강선’ 지역, 그리고 ‘산음동’ 지역을 핵시설로 지목하고 있었고,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삭간몰’이란 곳을 핵시설로 짚어내고 있었다.
김정은은 강선·산음동·삭간몰 이 3곳 말고 영변만 내놓으면 된다는 거냐, 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이 다짐을 받으려고 했던 ‘틀림없는 거냐’, 이 대목은
제재 해제가 틀림없이 이뤄진다는 거냐, 이런 뜻이다.
이때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들떠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8개월 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미·북 회담에서
뭔가 돌파구가 마련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노이로 향하는 열차에서 김정은이 문 대통령과 청와대에 세 차례나 전화를 했다는 것인데,
그때 문 대통령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매우 낙관적으로 대답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왜냐하면 나이로 봤을 때 아저씨뻘인 문 대통령은 조카뻘인 김정은을 이미 세 차례나 만난 상황이어서
개인적인 신뢰도·친밀도가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확실한 중재자 역할을 "책임 못질만큼" 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정은이 막상 하노이에 도착해서 트럼프를 만나보니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국은 ‘영변 + α’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김정은이 협상에 임할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면서 판을 깨버렸다.
게다가 김정은에게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으로 평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굴욕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김정은은 멋쩍게 웃으며 사양했다고 하는데, 속으로는 이를 빠드득 갈았을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김정은은 다시 열차를 타고
하노이에서 평양까지 3800km, 60시간 거리를 되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전 세계적 이목이 집중됐던 하노이 여행이었던 만큼
김정은·김여정 백두혈통 남매는 돌아가는 길이 국제적 굴욕이요 망신이었다는 기억을
뼈에 새겼을 것이다.
‘최고 존엄’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겪은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다 아시는 것처럼,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작년 6월 판문점에서 잠깐 조우했을 때도 사실은 안 보려고 했던 것이며,
작년 8월 문 대통령이 공동올림픽·평화경제 등을 말하자 "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며 사상 최악의 욕지거리를 내뱉었던 것이며,
이윽고 "남조선 당국과 마주 앉을 생각 없다"며 전화선을 끊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다시 김여정의 6월 담화문들을 볼 필요가 있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관련 당국자를 "배신자"로 지칭하고 있다.
6월 13일 담화문을 보면 이렇게 돼 있다.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즉,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받아내야 한다."
여기서 ‘쓰레기들’은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탈북단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배신자는 바로
‘하노이 굴욕’, ‘하노이 노딜’을 안긴 문재인 정부를 지칭한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노이 노딜에 대한 책임을 트럼프 미국정부에게 돌리기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이 먼저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김여정은 문 대통령을 향해
"못된 짓 하는 놈보다 못 본 척하는 놈이 더 밉더라"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이며,
북한 매체가 남한 당국자를 비난할 때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은 이런 말도 인용했다.
"베이징의 북한 통전부 관계자로부터
‘탁현민(현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즉 북한은 하노이 협상 타결을 믿고 남측 당국과 탁현민씨의 조언에 따라 이벤트까지 준비했는데
허사가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오늘 한 신문 칼럼은 이렇게 썼다.
"심지어 청와대가 희망적 사고에 사로잡혀
국민과 북-미 지도자를 북핵 해결의 환상으로 몰고 갔다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문재인 정부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6·25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대한민국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김정은 정권한테 ‘겁먹은 개’ 소리나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김여정 남매에게 닦달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당하고 있는 치욕이 분한 것이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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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5/20200625040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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