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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의 역사]美서 공산주의자 몰려 쫓겨난 중국인 과학자의 '복수'

colorprom 2020. 6. 26. 13:57

美서 공산주의자 몰려 쫓겨난 중국인 과학자의 '복수'

 

조선일보

 

  • 민태기 에스엔에이치 연구소장·공학박사

 

 

입력 2020.06.26 03:12 | 수정 2020.06.26 09:06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민태기 에스엔에이치 연구소장·공학박사

 

 

지난달, 미국의 스페이스X민간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전기차 테슬라로 자동차 시장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일론 머스크의 또 다른 업적이다.

 

대개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우주산업에서 이러한 성과는

민간 기업이 유인 로켓을 발사할 만큼 미국의 우주산업 생태계가 탄탄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미국의 로켓 기술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발전했던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이념에 집착한 소모적 정치와 여기에 휘말린 과학자의 기구한 삶이 있었다.


美로켓 연구 주도하던 중국 과학자

1950년 6월, 미국 FBI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서 제트추진연구소(JPL)를 이끌던

젊은 교수를 체포한다.

그가 바로 중국 과학자 첸쉐썬(錢學森·Qian Xuesen)이다.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한 첸쉐썬은 칼텍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JPL에서 미국의 로켓 연구를 주도했다.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V2로켓을 만든 폰 브라운 심문을 맡았던 그는

V2 제조 때 수만 명이 강제 노동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하지만 독일의 로켓 기술이 수십 년 앞서 있다며 폰 브라운을 데려오도록 했다.

이때까지 미국 정부의 첸쉐썬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바뀐다.

 

미국의 새로운 위협은 공산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950년 매카시 상원 의원의 주도로 미국 전역에서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이 벌어지고,

첸쉐썬은 이때 체포된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당국의 조사에도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첸쉐썬JPL 접근이 금지되고 모든 지위가 박탈되자,

그는 차라리 공산화된 중국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놀란 미국 정부는 그의 귀국 짐 꾸러미에 극비 문서가 있다고 덮어씌워,

그의 아내와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 모두를 가택 연금한다.

 

1955년 이 사연을 알게 된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

한국전쟁 때 사로잡은 미군 조종사 11명을 무려 5년간이나 연금 상태에 있던 첸쉐썬 가족과 교환한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로켓 기술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JPL 핵심 연구원들을 공산주의 혐의로 구속하거나 쫓아냈다.

독일에서 투항한 폰 브라운 역시

나치 동조자였다는 구실로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런데 1957년 상황이 급반전한다.

추방당한 첸쉐썬 중국서 인공위성 개발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린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로켓 기술이 별것 아니라며 두 달 뒤 자기네도 인공위성을 쏘겠다고 발표한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발사 장면을 생중계하고, 이때 발사한 뱅가드 로켓2초 만에 폭발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진다. 미국 정부는 기술 열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폰 브라운을 불러들여 항공우주국(NASA)을 만들고, JPLNASA에 가세한다.

폰 브라운JPL은 1958년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발사에 성공하며

소련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중국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하고,

화대혁명으로 지식층이 붕괴하는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마오쩌둥첸쉐썬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지원했다.

 

1964년 첸쉐썬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1967년에는 수소폭탄까지 완성하고,

마침내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다.

 

핵무기를 개발한 중국인공위성을 날린다는 것은 미국 본토가 중국 핵무기 사정권에 있다는 뜻이다.

중국을 후진 농업국으로 무시하던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갑자기 바뀐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과 총부리를 겨누던 중국의 유엔 가입이 1971년 승인된다.

불과 며칠 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대만유엔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중국이 차지한다.

 

핑퐁 외교를 통해 미국은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할 정도로 성의를 보였지만

중국은 미국과 수교하지 않는다.

결국, 1978년 미국이 혈맹 대만과 단교하자, 그제야 1979년 미국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정치가 결정한 과학자의 역량

첸쉐썬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지지했다.

1989년 그는 천안문 유혈 진압까지 적극 지지하며,

진압 책임자인 상해교통대학 후배 장쩌민이 당 총서기에 오르도록 도왔다.

 

이렇듯 그가 중국에서 이룬 과학적 업적의 이면에는

집권 세력과 협력하며 매우 정치적이던 또 다른 모습이 있다.

 

2009년 첸쉐썬이 9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구글은 검색창 커버를 그의 이미지로 장식했다.

 

첸쉐썬이 데려온 폰 브라운아폴로 계획으로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고,

첸쉐썬이 이끌던 JPL보이저호를 태양계 너머 인터스텔라로 보냈다.

 

이때 비로소 미국소련을 추월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이념 논쟁은 그를 중국으로 내쫓았고, 그는 중국미국의 맞수로 만들었다.

중국 문인 루쉰은 소설 '아Q정전'에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진 것'정신 승리'로 불렀다.

 

나치가 수많은 유대인 인재를 추방한 것이나,

미국이 매카시즘으로 수많은 인재를 쫓아낸 것,

그리고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도,

어쩌면 루쉰이 이미 경고한 '정신 승리'인지 모른다.

 

이념으로 똘똘 뭉쳐 정신만 차리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과학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과학자의 역량은 그 사회가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 즉 사회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결국 정치가 결정한다는 것을 로켓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정치가 과연 과학의 위력을 얼마만큼 심각하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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