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5.02 09:20 | 수정 2020.05.02 10:36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3회> 공포 정치와 군중 집회를 결합하다
키 크고 핸섬한 푸른 눈의 키란(Keiran)은 러시아 혁명사 ‘오타쿠’다. 고교 시절 그는 구소련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 문양 아래 CCCP(소련공산당)이란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와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수용소군도’를 정독하면서 그는 스탈린 정권의 폭력성에 눈을 떴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러시아 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키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1940년대 초반이면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이 이미 끝난 시점인데, 혹시 마오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통제를 모방하지는 않았나요?
그 당시 공산권 전역에서 스탈린이 누렸던 절대의 권위를 모른다면 결코 던질 수 없는 예리한 질문이다.
◇소련의 고문취조·사상검증 기법 전수받아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아 정풍운동을 기획한 제1의 인물은 바로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1936년 캉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과 긴밀한 협조 아래 수백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던 인물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경찰의 축적된 비밀정찰, 고문 취조 및 사상검증의 기법이 캉성을 통해 그대로 중국공산당에 전해졌다. 이 역시 스탈린의 기획으로 보인다. 1937년 11월 바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활약하던 왕밍(王明, 1904-1974)과 캉성을 전용 비행기에 태워서 옌안에 급파했기 때문이다.
옌안에 도착 한 후, 캉성은 곧 왕밍을 저버리고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는 마오쩌둥의 편에 선다. 캉성의 예측대로 모스크바도 마오쩌둥을 중국공산당의 최고영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부터 소련의 지식계에선 게릴라 혁명투사 마오쩌둥을 칭송하고 숭배하는 사회분위기가 나타났을 정도였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축약본도 그 즈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에게 캉성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캉성은 누구보다도 모스크바 유학파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의 정치상황에 밝았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마오처럼 캉성도 서예와 시작(詩作)에 깊은 조예가 있어 둘 사이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캉성은 또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 장칭(江靑, 1914-1992)을 마오에게 연결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장칭의 방종한 행실을 들춰내자 캉성은 장칭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결국 1939년 11월 19일 마오쩌둥은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 1910-1984)을 버리고 장칭과 네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놀랍게도 캉성과 장칭은 1930년대 초반 밀애를 나눴던 애인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캉성은 절대군주를 포섭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간교한 인물이다.
지금 캉성과 장칭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까닭이 있다. 장칭은 이후 문화혁명 4인방 중의 우두머리로 맹활약했으며, 캉성 역시 마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핵심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장칭과 캉성은 마오쩌둥에 고삐 잡혀 달려가는 쌍두마차의 두 말과도 같았다. 마오의 분신(分身)으로서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통치의 상징이었으며, 장칭은 대중선동의 구심이었다.
<3회> 공포 정치와 군중 집회를 결합하다
키 크고 핸섬한 푸른 눈의 키란(Keiran)은 러시아 혁명사 ‘오타쿠’다. 고교 시절 그는 구소련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 문양 아래 CCCP(소련공산당)이란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와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수용소군도’를 정독하면서 그는 스탈린 정권의 폭력성에 눈을 떴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러시아 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키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1940년대 초반이면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이 이미 끝난 시점인데, 혹시 마오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통제를 모방하지는 않았나요?
그 당시 공산권 전역에서 스탈린이 누렸던 절대의 권위를 모른다면 결코 던질 수 없는 예리한 질문이다.
◇소련의 고문취조·사상검증 기법 전수받아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아 정풍운동을 기획한 제1의 인물은 바로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1936년 캉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과 긴밀한 협조 아래 수백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던 인물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경찰의 축적된 비밀정찰, 고문 취조 및 사상검증의 기법이 캉성을 통해 그대로 중국공산당에 전해졌다. 이 역시 스탈린의 기획으로 보인다. 1937년 11월 바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활약하던 왕밍(王明, 1904-1974)과 캉성을 전용 비행기에 태워서 옌안에 급파했기 때문이다.
옌안에 도착 한 후, 캉성은 곧 왕밍을 저버리고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는 마오쩌둥의 편에 선다. 캉성의 예측대로 모스크바도 마오쩌둥을 중국공산당의 최고영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부터 소련의 지식계에선 게릴라 혁명투사 마오쩌둥을 칭송하고 숭배하는 사회분위기가 나타났을 정도였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축약본도 그 즈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에게 캉성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캉성은 누구보다도 모스크바 유학파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의 정치상황에 밝았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마오처럼 캉성도 서예와 시작(詩作)에 깊은 조예가 있어 둘 사이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캉성은 또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 장칭(江靑, 1914-1992)을 마오에게 연결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장칭의 방종한 행실을 들춰내자 캉성은 장칭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결국 1939년 11월 19일 마오쩌둥은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 1910-1984)을 버리고 장칭과 네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놀랍게도 캉성과 장칭은 1930년대 초반 밀애를 나눴던 애인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캉성은 절대군주를 포섭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간교한 인물이다.
지금 캉성과 장칭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까닭이 있다. 장칭은 이후 문화혁명 4인방 중의 우두머리로 맹활약했으며, 캉성 역시 마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핵심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장칭과 캉성은 마오쩌둥에 고삐 잡혀 달려가는 쌍두마차의 두 말과도 같았다. 마오의 분신(分身)으로서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통치의 상징이었으며, 장칭은 대중선동의 구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