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4.17 20:27 | 수정 2020.04.18 11:28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광기의 시대'
481만명 반혁명분자 낙인 찍어, 200만명 사망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입었다"
문화혁명 주도한 마오쩌둥 지금도 신격화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가 쓰는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를 매주 연재합니다.
※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가 쓰는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를 매주 연재합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송재윤 교수는
3부작으로 구상 중인 책의 1권인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를 최근 출간했습니다.
이번에 쓰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중국을 바라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송재윤 인터뷰 “한국 권력자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라” 바로가기(bit.ly/3ahAOgL)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서평 기사 바로가기(bit.ly/2xBLIAx)
<1회>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전 인민이 난투극을 벌이다
◇1966년부터 10년 간 “광기의 시대”
2년 전 초가을이었다. 필자가 가르치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국인 유학생 황타오(黃燾·가명)가 메일을 보내왔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그는 학부 4학년생 ‘문화혁명’ 수업에 참가하고 싶다며 정중히 허락을 구해왔다. 메일 말미에 자신이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968년 4월 중국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한 공장 창고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여러 차례 난창대학을 방문한 경험이 있기에 나는 황타오의 이력에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어려서 문화혁명을 직접 경험한 산 증인을 학부 수업에 매번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겠는가? 흔쾌히 그의 청강을 허락했다.
며칠 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황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 명 정도의 전공생들만 들어오는 소규모 세미나 수업이었다. 여느 때처럼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세미나실 타원형 테이블 앞에 둘러 앉아 좀 어색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녀비율도 엇비슷했고, 흑, 백, 황, 갈의 인종비율도 적절했다. 지난 10년 간 매해 문화혁명 세미나를 개설해 왔지만, 첫 시간엔 언제나 가슴이 뛰고 손에는 땀이 쥐어진다. 커튼을 치고 프로젝트를 켜고 준비한 슬라이드를 흰색 스크린 위에 띄웠다.
☞송재윤 인터뷰 “한국 권력자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라” 바로가기(bit.ly/3ahAOgL)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서평 기사 바로가기(bit.ly/2xBLIAx)
<1회>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전 인민이 난투극을 벌이다
◇1966년부터 10년 간 “광기의 시대”
2년 전 초가을이었다. 필자가 가르치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국인 유학생 황타오(黃燾·가명)가 메일을 보내왔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그는 학부 4학년생 ‘문화혁명’ 수업에 참가하고 싶다며 정중히 허락을 구해왔다. 메일 말미에 자신이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968년 4월 중국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한 공장 창고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여러 차례 난창대학을 방문한 경험이 있기에 나는 황타오의 이력에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어려서 문화혁명을 직접 경험한 산 증인을 학부 수업에 매번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겠는가? 흔쾌히 그의 청강을 허락했다.
며칠 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황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 명 정도의 전공생들만 들어오는 소규모 세미나 수업이었다. 여느 때처럼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세미나실 타원형 테이블 앞에 둘러 앉아 좀 어색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녀비율도 엇비슷했고, 흑, 백, 황, 갈의 인종비율도 적절했다. 지난 10년 간 매해 문화혁명 세미나를 개설해 왔지만, 첫 시간엔 언제나 가슴이 뛰고 손에는 땀이 쥐어진다. 커튼을 치고 프로젝트를 켜고 준비한 슬라이드를 흰색 스크린 위에 띄웠다.
“China’s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문화혁명, 문혁. 1966년 5월 16일 중공정부의 공식적인 선언과 함께 시작된 문혁은 1976년 10월 4일 4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서구의 학자들은 문혁을 “마오쩌둥 최후의 혁명”이라 부른다. 극단의 시대, 광기의 역사, 상실의 세대, 상흔(傷痕) 문학….
◇중국인들 “10년 간의 커다란 겁탈”
그때 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청바지 차림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디밀었다. 검게 탄 피부, 근육질의 다부진 몸집, 무신경한 옷차림인데, 안경 너머 눈빛만은 형형했다. 얼핏 보면 짐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장시간 지적 연마에 힘써온 학인(學人)의 얼굴이었다. 학생들에게 황타오의 “특이한” 이력을 소개했다. 학생들은 큰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학생들의 박수에 당황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문화혁명을 보통 뭐라고 부르지요? 중국어로 얘기해 주세요.” 황타오는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년호겁(浩劫)!”
호겁(浩劫)의 사전적 의미는 ‘대재난’이다. 글자를 뜯어보면 ‘커다란 겁탈(劫奪)’의 의미이다. 겁탈이란 위협이나 폭력을 써서 타인에게서 무엇인가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이른다.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의 광기와 폭력에 치를 떨면서 그 시대를 한마디로 “겁탈의 시대”라고 부른다. 과연 문화혁명은 어떤 사건이었나? 왜 하필 “겁탈의 시대”인가? 우리는 왜 바로 지금 여기서 문혁의 역사를 공부해야만 할까?
◇“481만명 반혁명 분자 낙인, 200만명 사망·실종”
2013년 10월 25일 베이징(北京) 대학 스탠포드(Stanford)센터에서는 ‘마오쩌둥시대를 기록하다(寫毛澤東時代)’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 중국의 자유 성향 저널 ‘염황춘추(炎皇春秋)’의 편집자 양지성(楊繼繩·1940- )은 ‘노선·이론·제도: 문화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문혁 발생의 근본 원인은 17년 간 중국을 지배해 온 이념(ideology)과 정치노선이라 주장한 후, 청중의 눈앞에 충격적인 자료를 공개했다. 바로 1978년 12월 1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주석 예잰잉(葉劍英·1897-1986)이 직접 폭로한 문혁 피해자 규모 관련 수치였다.
그의 폭로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세월 동안 1)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55만 7000명이 실종되었다. 2)대규모 무장투쟁이 4300 여 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12만3700 여명이 사망했다. 3)250만 명의 간부들이 비투(批鬪·비판투쟁)의 미명 아래 집단 린치를 당했고, 30만2700 명의 간부들이 불법 구금되었으며, 그 중 11만5500 명의 간부들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4)도시에서는 481만 명의 각계 인사들이 “역사 반혁명”, “현행 반혁명”, 계급이기(異己·적대)분자, 반혁명수정주의 분자,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낙인찍히고, 그 중 68만3000 여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5)농촌에서는 520여만의 지주, 부농(대부분의 중상농 포함)과 그 가속들이 박해를 받아 약 120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1984년 4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이하 중공중앙)에서는 2년 7개월에 걸친 조사, 검증을 통해 새로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문혁 10년 동안 420만 명이 구금 상태에서 취조 당했고, 172만 8000여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13만 5000여 명이 현행 반혁명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무장투쟁으로 27만 7000여 명이 사망했고, 703만 여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7만 여 가정이 파괴되었다.
과연 두 조사 중에서 무엇이 문혁의 현실에 부합하는지 확정하기는 이르다. 다만 1978년 12월은 중국공산당이 문화혁명의 유산을 청산하고 개혁개방의 노선을 공식 당론으로 채택하던 시점이다. 인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긴급히 4인방을 체포한 후, 서둘러 문혁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문혁 당시 옥중에서 병사한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1898-1969)의 명예는 1980년 2월에야 복권된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중공중앙으로선 반드시 문혁의 광기를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혁 당시 “개혁개방”을 주장하면 곧 반혁명수정주의의 멍에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1984년이면 이미 개혁개방이 추진된 지 다섯 해나 지난 시점이었다. 중공중앙은 상품경제의 개념을 도입해 경제자유화 및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미 문혁 피해자들에 대한 대규모 복권이 이뤄진 후였다. 개혁개방의 당위를 역설하기 위해 문혁의 피해를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978년의 발표가 더 신빙성이 있는 듯하지만, 중공중앙은 1984년의 조사를 공식통계로 채택하는 듯하다.
◇수백만 명 죽음으로 내몬 마오쩌둥을 신격화
그림 한 장이 수천 단어를 능가한다. 피해자의 수치는 분명 수백 편의 논문을 압도한다. 스탈린은 대숙청(Great Purge, 1937-1938)으로 68만에서 120만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Holocaust, 1941-1945)를 자행해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문혁 기간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억 1300만 명에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바로 그 마오쩌둥이 지금도 중국에선 최고의 영도자로 신격화되어 있다. 모든 지폐 위에 그의 초상화가 있고, 모든 대학 캠퍼스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국의 어디를 가나 건물 벽에 적힌 그의 ‘명언’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놀란 학생들의 입이 벌어져 있다.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표정이다. 문혁 시절 난창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황타오는 스크린에 펼쳐진 통계수치를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아마도 그 통계를 직접 본 적은 없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순간 보라색 비단 히자브(Hijab)로 두 볼과 목을 감싸고 있는 아미라(Amira)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데 왜 문화혁명이라고 부르나요? 문화 자체를 바꾸는 혁명이란 의미인가요? 아니면 문화를 통해서 사회를 바꾸는 혁명인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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