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영화]'1917' (송혜진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20. 2. 18. 16:33



[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그는 우유 한 모금에 잠시 전쟁을 잊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2.18 03:00

'1917'의 흰 우유

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이 글엔 영화 '1917'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눈앞엔 거짓말처럼 흰 우유가 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오래 굶주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고지가 눈앞인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아서, 스코필드(조지 매카이)는 그동안 멈추질 않고 걸었다.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고, 시체가 온통 밟힐 때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줄곧 전진만 하던 그가 농장에 도착해 발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그곳엔 갓 짜놓은 우유가 있었다.
누가 언제 짜놓은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스코필드는 홀린 듯 주저앉는다. 우유를 한 모금 맛본다.
아직 달고 신선했을까. 그는 수통을 열고 허겁지겁 우유를 따라 붓는다. 헐떡이며 손으로 우유를 떠 마신다.
그때 눈앞에서 전투기 한 대가 떨어져 내린다.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은 기묘한 영화다. 전쟁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펙터클한 장면은 별로 없다.
그저 주인공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를 바싹 좇아갈 뿐이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 독일군 계략에 휘말리지 않도록
"공격을 중지하라"는 에린 무어(콜린 퍼스) 장군의 말을 전하러 가는 길. 한시가 급하다.
서툰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넘어져도 일어나야만 한다.

그런 이들을 따라붙던 카메라가 그럼에도 잠시 멈출 때가 있다.
주인공이 먹을 것과 마주치거나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꺼낼 때다.
쉴 새 없이 목을 조이는 적의 공격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전쟁도 그 순간 얼어붙는다.
잊고 있던 정적이 밀려들고, 배고픔이 강렬해진다. 그리고, 살고 싶어진다.

'1917'이 보는 이를 울컥하게 하는 건 이처럼 뜻밖의 순간에서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달려가 명령을 전해도 전쟁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끝없이 피 흘리고 쓰러진다.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우리는 가끔 멈출 수밖에 없다.
우유 한 모금을 삼킬 때가 그렇고, "내게 음식이 조금 있다"며 가방을 뒤져 먹을 것을 남에게 건넬 때가 그렇다. 총보다 두려운 것이 배고픔이고, 전쟁보다 질긴 게 우리 목숨이다.

블레이크는 "포탄에 벚나무가 썩어 스러지면 더 많은 나무가 자랄 것"이라고 말한다.
스코필드우유를 삼키고 일어선다. 살아남은 덕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8/20200218001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