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2.31 03:10
한 여성 노인이 나를 붙잡고 ○○번 버스는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1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노선이 바뀌어 이제는 그 버스가 서지 않는 정류장이었다.
지도 앱을 켜서 가는 길을 검색한 후 올바른 정류장과 타야 할 버스 번호를 알려주었다.
노인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복 받으소. 복 받으소"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이가 떠난 후 내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혀를 찼다.
"에잇, 노인네가 길도 모르면서 돌아다녀. 추운데 집에 있지."
우리는 이런 식의 생각이나 발화에 익숙하다.
우리는 이런 식의 생각이나 발화에 익숙하다.
타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차별이지만, 살짝 걱정을 곁들이면 말랑해 보인다.
배려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배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약점이 있든 그가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마련해주는 장치라면
배제는 그 기회 자체를 빼앗는다.
바뀐 노선에 대한 안내가 충분했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직관적 표식이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이 순식간에 노인 개인의 문제로 축소된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원활'하게 행동하고 대처하지 못하는 다양한 범위의 인간에게 뻗어나간다.
아이들은 이래서, 장애인은 저래서, 여자한테는 힘든 일이라서….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자신이 선량하다고 믿는 시민이 차별하는 원리를 분석한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그렇게 내뱉은 남자도 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길을 물어봤다는 사실이다.
그도 한때는 낯선 길 앞에서 기민한 판단력과 빠른 눈치로 길을 찾아가던 젊은이였겠지. 여성 노인처럼.
스마트 기기로 무장한 나에게도, 별것 아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어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귀찮고 거슬린다며 다 떠밀다 보면 그 촘촘한 그물망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느새 내가 된다.
이마저도 한 줌 공감과 연민에 기대는 말이다.
내가 배제될 가능성이 있든 없든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차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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