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3 금
<가룟유다와 은 삼십>
마태복음 27장 1-10절
금요일새벽, 예수님은 결박당한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로마총독앞으로 나아갑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종교적으로 정죄를 받고,
로마 정부에게는 정치범, 즉,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덧씌어져서
십자가형으로 받기위해 빌라도 총독앞으로 넘겨집니다.
그 새벽,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판 댓가로 받은 은전 삼십을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건네주려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3절)
가룟유다가 뉘우쳤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뉘우치다’의 의미는 내적인 뉘우침,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뉘우침을 뜻합니다.
유다는 죄없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뉘우침은 하나님께로 완전히 방향전환을 하는 뉘우침, 충분한 회개하고는 거리가 먼 뉘우침입니다. 그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후회였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긴 책임을 회피해보고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은 삼십을 갖다줍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댓가를 자신들이 담당하는걸 원치않았고, 은 삼십을 받지 않습니다. 유다는 손에 쥔 “은 삽십”을 성소에 던져놓습니다. 그리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합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유다는 제자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나아온 것 같지만,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생각대로 예수님이 행동하지않자 은 30에 팔아버리고,
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후, 자기 스스로 그 죄값을 치루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유다가 성소에 버린 돈은 사람을 죽인 핏값이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에도 사용될 수 없었기에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거두어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합니다.
묘지는 부정한 땅입니다.
유다의 부정한 돈은 결국 부정한 땅을 사는데 사용되었고,
자신의 뜻을 좆아 마지막까지 행동했던 가룟유다는 참으로 비참한 흔적을 남긴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로마총독 앞으로 이끌려간 사이,
가룟유다의 부정한 죽음이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했던 가룟유다가 스스로 자살한 것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가룟유다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다루시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근원자체가 죄인인 인간이 옳지못한 행동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많은 뉘우침을 한다해도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인간의 죄값을 해결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이요”(요한일서 1장 9절)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나아가 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한량없는 은혜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범사에 예수이름 의지하며,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로 강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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