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작년 2월 체류증을 달라고 파리경찰청〈사진〉에 신청했다. 갖가지 서류를 번역·공증해 제출하느라 땀을 뺐다. 7월이 되자 플라스틱으로 된 체류증이 나왔다. 파리에서 10년 넘게 근무 중인 일본 방송사 특파원은 "5개월 만에 나왔으면 많이 빨라진 것"이라며 웃었다. 기자는 다음 절차를 서둘렀다. 체류증이 나온 지 일주일 만에 서류를 잔뜩 준비해 한국 운전면허증을 내고 EU 면허증을 받는 교환을 신청했다.
하지만 연말이 다가오고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웃 프랑스인들에게 물어보니 한결같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예 잊고 살다가 드디어 지난달 파리경찰청에서 연락이 왔다. 신청 후 13개월 만이었다. 기쁜 마음에 달려갔더니 "2개월이 더 필요하니 좀 더 기다려달라"는 답을 들었다. 운전면허증 하나 교환하는 데 15개월 걸리는 셈이다. 창구 담당자는 "2년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주변 프랑스인들에게 왜 행정 처리가 느린지 물어봤다. 다들 어릴 때부터 천천히 일하는 게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몇 프랑스 기자는 "칼같이 빨리 일하는 걸 영미식 문화로 여기고 심리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프랑스인들은 컴퓨터보다 종이 문서로 일하는 걸 유독 좋아한다는 설명도 나왔다.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엘리트 공무원은 "프랑스인은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자는 생각이 강해서 민원 업무를 하는 하급 공무원 사이에는 '천천히 일하자'는 암묵적 약속이 있다"고 했다. 여름 휴가를 한 달씩 가고 병가(病暇) 사용이 쉬워 업무가 자주 끊긴다는 것도 한몫한다. 공무원 노조가 강성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연원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나폴레옹 시대와 뒤를 이은 식민 통치 시기에 방대한 영토 관리를 위해 행정 조직이 비대해진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구 6600만명인 프랑스에서 공무원은 560만명에 이른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공공부문 개혁 핵심이 공무원 줄이기다. 스타트업 경영자 미카엘 마스는 "일을 빨리 하면 그 많은 공무원이 필요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셈이 되니까 자리 보전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들 알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 행정 관청이 일을 빨리 할 줄 모르는 건 아니다. 기자는 이달 초 과속 단속에 걸렸다. 나흘 만에 범칙금 고지서가 발송됐고 이틀 만에 집에 도착했다. 범칙금 내라는 것 하나는 '초스피드'라며 씩씩거렸더니 기자가 사는 아파트 관리인은
"돈은 누구에게나 빨리 필요한 법"이라며 웃었다.
요즘 프랑스는 스타트업 창업 붐이 일어나는 것과 맞물려 정부도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과거 어느때보다 높다. 공무원을 감축하겠다는 마크롱의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고, 업무 평가를 강화해 상벌(賞罰)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결국 제도를 바꿔야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