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모란공작 (牡丹孔雀) (정민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4. 24. 14:22

[정민의 世說新語] [516] 모란공작 (牡丹孔雀)


조선일보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          
    입력 2019.04.24 03:14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
    고려 개성을 읊은 9수 중 제5수는 이렇다.

    "고려 때 재상이 살았던 집 가리키니, 황폐하다 비바람에 흙담마저 기울었네.
    모란과 공작은 모두 다 스러지고, 노랑나비 쌍쌍이 장다리꽃 위를 난다.

    (指點前朝宰相家, 廢園風雨土墻斜. 牡丹孔雀凋零盡, 黃蝶雙雙飛菜花.)"

    예전 고려 때 재상이 살던 집은 흙담마저 기울어 금세 무너져 내릴 판이다.
    옛날 권력에 취해 거리낄 것 없던 시절에는 모란이 활짝 핀 정원에 공작새가 놀았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 빈터에 일군 채마밭에 노랑나비만 난다.

    고려 신종(神宗) 때 일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약송(車若松)이 특진관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갔다.
    차약송이 물었다. "공작은 잘 있소?" 기홍수가 대답했다. "고기를 먹다 가시가 목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기홍수가 물었다. "모란을 잘 기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차약송이 그 방법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말했다.
    "재상의 직책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있거늘,
    다만 꽃과 새만 논하고 있으니 어찌 백관의 본보기가 되겠는가?"

    유득공의 위 시는 이 고사를 가지고 지었다.

    명나라 중종화미조(畵眉鳥)를 몹시 사랑했다. 수많은 조롱 속에 한 마리씩 따로 넣어 길렀다.
    누가 말했다. "화미조에게 갓 까고 나온 새끼 거위의 골을 먹이면 더 기막히게 운다고 합니다."
    천자가 즉시 광록시(光祿寺)에 명해 날마다 새끼 거위 300마리를 잡아 그 골만 빼서 화미조에게 먹이게 했다. 과연 새의 목소리가 더욱 아름다워져서 궁궐의 깊은 정원이 화미조의 맑은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평자가 말했다. "운치야 있겠지만, 천하일을 살펴야 할 천자 가 어찌 이 같은 일을 한단 말인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공작변증설(孔雀辨證說)'에 나온다.

    재상은 모란과 공작에 취해 나랏일은 뒷전이었고,
    천자는 새 울음소리에 빠져 하루 300마리나 되는 새끼 거위의 골을 파냈다.
    모란이 탐스럽고 공작이 화려하며 화미조의 소리가 사랑스러워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를 살피지 않았다.
    차례가 틀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3/20190423036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