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김대식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4. 24. 14:37

[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 [338]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조선일보
                             
  •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          
    입력 2019.04.24 03:11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기원전 1353년(?) 즉위한 아멘호테프 4세이집트 파라오 자리에 오른 지 5년 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고대 이집트 문명의 핵심은 다신 숭배였다.
    그런데 아멘호테프 4세는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톤(Akhenaton)으로 바꾸며 종교 개혁을 시행한다.
    수천 명의 신을 모두 없애고 태양신(아톤)을 유일한 신으로 내세운 것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모세'를 히브리인이 아닌 이집트인이라고 생각했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모세아케나톤으로 지칭한다.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요셉과 형제' 또한 아케나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현대음악가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오페라 '아크나텐(Akhnaten)' 또한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아케나톤이 죽은 후 다시 권력을 잡은 다신 숭배자들은 그의 기억을 이집트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아케나톤의 동상과 신전은 파괴되고 단일신 사상 또한 잊힌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행위를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e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이라 불렀다.

    형이 두려워 엄마 품에 숨은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로마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카라칼라
    게타에 대한 모든 기록과 유물을 지우려 노력한다.
    콘스탄틴 황제 역시 경쟁자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막센티우스의 동상 얼굴을 본인의 얼굴로 바꿔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사상 완벽한 담나티오 메모 리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적 기록을 파괴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막센티우스게타아케나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증거가 디지털 데이터로만 남아 있을 미래 시대.
    버튼 하나로 개인과 국가의 경쟁자를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 있게 되는 날,
    인류는 드디어 완벽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시대에 살게 되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3/20190423036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