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볼거리가 많은 맨해튼 도심을 걸어다니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마천루다. 디자인이 각양각색인 마천루가 어우러져 만든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지만, 고정 불변이 아니라 마치 생물처럼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오래된 철도역과 주차장만 있던 맨해튼 미드타운 서쪽 허드슨 강변은 원래 버려진 공터였지만, 최근에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로 인해 101층, 88층, 52층짜리 초고층 건물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도 도심 곳곳에선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을 마천루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57번가에 들어설 예정인 435m 높이의 '111 W(웨스트) 57'은 연필처럼 가늘고 길게 생겨서 완공 시 '뉴욕에서 가장 날씬한 마천루'로 등극할 전망이다. 그랜드센트럴역(驛) 옆에 건설 중인 주상 복합 건물 '원 밴더빌트'는 2020년 완공 시 뉴욕에서 넷째로 높은 건물(427m)이 된다.
높이와 모양이 고만고만한 건물이 줄지어 있는 서울과 달리, 뉴욕에선 어떻게 이처럼 다채로운 빌딩이 끊임없이 들어설 수 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뉴욕에도 건설 규제가 존재한다. 1916년 제정된 '조닝(zoning)' 법이 건물의 용도, 용적률, 건폐율, 높이 등을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뉴욕시는 땅이나 기존 건물 위의 하늘을 개발할 수 있는 권리인 '공중권(Air Rights)'을 만들어 민간 건설사들이 창의적인 건물을 자유롭게 세울 기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건물주가 건물 높이 5층이 한도인 지역에서 25층짜리 빌딩을 짓고 싶다면 인근 저층 건물의 공중권을 사들이면 된다. '원 밴더빌트'는 그랜드센트럴역의 공중권을 사들여 초고층 건물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규제를 만들되, 이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 '마천루의 도시' 뉴욕을 만든 비결인 셈이다.
반면 최근 서울시는 올 하반기부터 재개발·재건축 사업 초기 단계에서 단지 디자인과 높이, 배치 등을 포함한 '사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과거엔 재건축·재개발 정비 계획을 민간이 수립하면 서울시가 심의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전에 시가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획일적인 디자인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도 많은 규제에 규제가 하나 더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각양각색의 고층 건물이 어우러져 탄생한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규제'가 아닌 '자율' 덕분에 가능했다. 만약 서울시가 규제로만 일관하려 한다면, 역동적이고 다양한 개성이 공존하는 도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입력 2019.04.18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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