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2.22 03:00
[오늘의 세상]
이태석 신부 권유로 한국行 9년만에, 남수단 청년 토마스 의사되다
2001년 서른아홉 살 한국인 신부가 흙먼지 날리는 아프리카 남수단 시골 마을 톤즈(Tonj)에서
외진 집을 돌며 주사를 놓고 붕대를 감았다.
그때 약통 들고 따라다니며 신부님을 돕던 열여섯 살 남수단 소년이 한국에 건너와 의사가 됐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21일 고(故) 이태석 신부의 도움으로 이 신부의 모교인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21일 고(故) 이태석 신부의 도움으로 이 신부의 모교인
한국 인제대 의대에 유학 온 토마스 타반 아콧(33)씨가 2019년도 의사국가시험 실기시험에 합격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온 지 9년 만에 이태석 신부의 후배가 된 것이다.
토마스씨는 또렷한 한국말로 "앞으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외과 전문의가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
신부님의 사랑을 갚겠다"고 했다.
"형제가 '8남1녀'"라는 말도 한국말로 했다. 그는 그중 다섯째다.
이 신부는 2001년부터 8년간 남수단에서 의료·교육 봉사를 하다 대장암에 걸려
2010년 마흔여덟 살로 선종했다.
이 신부가 톤즈에서 인술을 베풀 때 토마스씨는 천주교 재단 중학교에 다녔다.
처음엔 이 신부의 복사(服事·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평신도)였고,
다음엔 약통을 메고 이 신부와 나란히 들길을 걷는 조수였다.
이 신부가 주사를 놓을 때면 토마스씨가 아이들을 붙잡고 있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가 창궐하고 내전이 이어지는 땅에서,
이 신부는 마을 아이들 35명을 모아 브라스밴드를 꾸렸다. 토마스씨가 '1호 멤버'였다.
이 신부는 2008년 휴가차 귀국했다 대장암 투병을 시작했다.
이 신부는 2008년 휴가차 귀국했다 대장암 투병을 시작했다.
남수단에 남아있던 토마스씨가 이듬해 한국에 건너와
이 신부가 머물던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에 찾아가 1주일간 머물렀다.
임종 하루 전, 다시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토마스씨는 "신부님 얼굴이 수단에서 본 모습과 너무 달랐다"고 했다.
"얼굴, 팔, 다리 살이 엄청 빠졌는데, 배는 많이 나오고…. 충격받아서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얼굴, 팔, 다리 살이 엄청 빠졌는데, 배는 많이 나오고…. 충격받아서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신부님이 제 마음을 아셨는지 편하게 해주려고 농담을 하셨어요.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이 신부의 뜻에 따라 인제대와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가 토마스씨의 학비를 댔다.
이 신부의 뜻에 따라 인제대와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가 토마스씨의 학비를 댔다.
첫 2년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3년째 되던 해 김해에 있는 인제대 의대에 '12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경상도 사투리 알아듣느라 영화 '친구'를 보며 한국어 공부를 했다.
"부산 친구, 구미 친구, 대구 친구 세 명이 사투리가 다 달랐어요."
의대 교과서 보는 건 더 어려웠다. "제가 한자를 모르잖아요. 무릎관절을 슬관절이라고 하더라고요."
최석진 인제대 의대 교무부학장이 "의학 용어 중엔 우리나라 학생도 모르는 한자가 많은데,
최석진 인제대 의대 교무부학장이 "의학 용어 중엔 우리나라 학생도 모르는 한자가 많은데,
그래도 끝까지 독하게 외운 제자가 토마스"라고 했다.
다행히 음식은 잘 맞았다. 산낙지, 청국장, 개고기 세 가지만 못 먹는다.
다행히 음식은 잘 맞았다. 산낙지, 청국장, 개고기 세 가지만 못 먹는다.
그는 "라면 중엔 신라면이 최고"라고 했다.
토마스씨는 "처음엔 졸업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졸업을 하고 보니 의사 시험도 합격할 수 있겠더라"고 했다. 졸업 후 치른 첫 시험에선 실기시험에 떨어져 낙방했다.
토마스씨는 "처음엔 졸업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졸업을 하고 보니 의사 시험도 합격할 수 있겠더라"고 했다. 졸업 후 치른 첫 시험에선 실기시험에 떨어져 낙방했다.
"떨어진 첫날은 너무 괴로웠는데 둘째 날 되니 '한국 친구들도 떨어지는데…' 하고 털어냈어요."
그는 "신부님은 제가 한 번도 한국에 유학 오라는 이유를 말해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신부님은 제가 한 번도 한국에 유학 오라는 이유를 말해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많은 아이들 중 왜 자신에게 기회를 줬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여기서 열심히 의학을 배워 우리나라에 돌아가 어려운 사람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그분이 원하시는 거라 생각해요."
유학 생활 동안 고향에 네 차례 다녀왔다. 비행기표 값이 비싸, 더 자주 갈 처지가 못 됐다.
유학 생활 동안 고향에 네 차례 다녀왔다. 비행기표 값이 비싸, 더 자주 갈 처지가 못 됐다.
작년 2월 남수단에서 별세한 아버지도 한국에서 마음으로만 임종했다.
토마스씨는 "아버지가 무슨 병인지 진단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면서
"내가 더 빨리 의사가 돼 돌아갔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힘들 때 이 신부가 자주 하던 말을 되새겼다.
그는 힘들 때 이 신부가 자주 하던 말을 되새겼다.
"토마스, 열심히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런데 나중에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열심히 해야 해."
이 신부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뭐라고 했을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잘 했어, 수고했어,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해'라고 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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