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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의 세 가지 罪 (김기철 위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12. 18. 20:08

[태평로] 高宗의 세 가지 罪


조선일보
                             
             
입력 2018.12.18 03:15

국제 정세 오판하고 국가보다 皇室 이익 앞세우며 제 편·남 가르는 '진영 정치' 앞장
낭만적 고종觀은 역사 誤導

김기철 논설위원
김기철 논설위원


지금 덕수궁엔 1905년 9월 조선을 찾은 미국 고위급 사절단에게 준 고종 사진이 전시돼 있다.
지난달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展)을 위해 113년 만에 돌아온 유물이다.

고종은 황룡포에 보라색 익선관을 쓴 황제 차림이다.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촬영한 이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맏딸인 앨리스와 함께 온 기업인 에드워드 해리먼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빌려왔다.

고종은 당시 러일전쟁 강화를 중재한 미국 도움을 기대하며 스물한 살 앨리스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성대한 오찬을 베풀고 황실 가마로 모셨다.
떠나는 앨리스 일행에겐 고급 피나무 함에 담아 사진을 선물로 줬다.
황제가 다스리는 독립국 대한제국을 기억해달라는 취지였다.

앨리스는 냉정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앨리스의 평가는 대한제국을 향한 외부의 시각을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고종이 '미국 공주'에게 매달렸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정책은 영국·미국 등 대서양 세력의 경계심을 촉발했다.

이 틈을 탄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앨리스 방한 2주 전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쓸 만큼 대한제국을 불신했다.
고종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루스벨트 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릴 만큼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

고종청일전쟁 때는 미국 공사관, 러일전쟁 때는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에 구출됐고 을미사변 후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러일전쟁 직전 중국 칭다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틈만 나면 외국 공사관 피신·망명설(說)이 도는 국가 지도자를 어느 나라가 제대로 인정해줄까.

고종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그의 재위 44년은 한·중·일 삼국이 생존(生存)을 위한 필사의 근대화 경주(競走)를 벌이던 때였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서두르기보다 군주의 위신을 앞세우며 예산을 탕진했고
갑신정변·동학혁명 같은 고비마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러일전쟁 때는 중립국 선언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은 세계의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고종이 국력을 모아 헌법과 의회, 근대적 사법체제를 마련하고
나라 살림을 키워 근대 문명 국가로 전환했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식민지 신세로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국가 개조를 위해 손잡아야 할 우호 세력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탄압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군주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을 합해도 벅찬 시기에 고종은 철저히 자기편과 남을 가르는 진영(陣營)정치의 선두에 섰다.

고종이 각국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는 비밀 외교를 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약육강식 시대에 힘없는 나라를 도와줄 선의의 이웃은 없었다.
최근 드라마와 연극, 전시로 고종에게 '개혁' '항일' 코드를 입히는 재조명 열기는 사실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근대 국가를 꿈꾼 '고종의 길'로 미화한다고 해서
망국으로 이끈 죄(罪)는 줄지 않는다.

35년간의 일제(日帝) 지배를 부른 1차적 책임은 고종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7/2018121702948.html



박상현(chui****)모바일에서 작성2018.12.1919:02:40신고
이조 500년은 우리 민족의 수치스런 역사이다.
고조선 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문화가 조선에서 소중화 조공국으로 찌그러졌다.
형제국 일본은 스스로 자강하였지만 조선은 남에게 빌붙타가 망했다.
고종은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민비랑 공모해서 국고 탕진하고 개혁에 나서지 않아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망국의 길로 갔다.
오늘날 좌익들은 고종과 똑같은 주자학 찌끄레기들로 역사반동에 앞장서고 있으니 참으르 개탄스럽다. 특히 학계 지식인들이 썩었다.
유성출(yoo****)2018.12.1913:12:45신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일본 천황에게 천황폐하만세를 외쳤던 그들이
조선 황실에게 무서운 칼을 휘두른 민주공화국이었다.
남의 나라 임금에게 충성을 하고 자기 나라 임금에게 침을 내뱉은
배신적이고 위선적인 민주공화국이었다.
유성출(yoo****)2018.12.1913:07:04신고
그래서 조선이 망한 원인과 책임을 자기 왕실에게 돌렸다. 그리고 민주공화제를 찬양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태어나자마자 옛 왕실 재산을 몰수하고 지위와 명예를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교과서는
자기 왕실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공격하고 백성을 억압한 역사의 봉건잔재로 낙인찍었다.
고종의 죽음으로 발발한 31독립만세는 근대적인 민주공화제 수립 운동으로 뒤바뀌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일제와 끝까지 싸운 안중근과 만주 독립군들은
어리석은 봉건주의자로 매도되었다.
한국인은 서구 민주주의 앞에 자기 역사와 전통을 스스로 짓밟고 말았다.
역사에 책임을 느끼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좋든 나쁘든 옛 왕실은 자기 조상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한국인은 지켜주지 못했다.
박희웅(chrisd****)2018.12.1905:20:40신고
치열한 국제정세에 둔감하고 나만 착하게 굴면 주변의 강대국이 우리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며
힘들게 일해서 먹고사는 것보다 가진자들 것을 조금만 뻿어서 나눠먹으면 다들 편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경제관념을 가지 문재인은 고종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강영성(kys****)모바일에서 작성2018.12.1905:20:22신고
평화로 포장된 상자속에 젊은 능구렁이 김정은 고향동지를 모시고 북치고 장구치면서 난리법석짓은
고종을 능가하고도 남을무능과 헛발질이 아닌가 생각이 절로 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7/20181217029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