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2.20 03:09
해방 무렵 북쪽엔 '소월', 남쪽엔 '목월'이란 말이 회자됐다.
박목월(1915~1978)은 한밤중 적막 속에서
향나무 연필을 깎아 사각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초고(草稿)를 썼다.
원고지에 옮겨 적을 때는 만년필을 애용했다.
"이슥토록/글을 썼다/새벽 세 시/시장기가 든다/
연필을 깎아 낸 마른 향나무/고독한 향기,/
불을 끄니/아아/높이 청과일 같은 달." ('심야의 커피')
1915년에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1세 때 왕릉과 수양버들이 우거진 경주로 이사했다.
1915년에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1세 때 왕릉과 수양버들이 우거진 경주로 이사했다.
본명은 영종이다. 아버지는 정미소를 하다가 문을 닫았다.
대구 계성중학교(지금의 계성고등학교)를 나와
19세 때 경주의 금융조합에서 월급 30원을 받으며 서기 노릇을 시작했다.
"나는 20대의 태반을 경주에서 보냈다. 친구도 여인도 다방도 없는 경주에서 인생의 개화기를 맞이했다."
'화랑의 후예'란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한 김동리가 경주에 있었다.
목월이 먼저 그를 찾아가 만났다.
1939년 9월, 동아일보에 실린 '문장'지 광고에서 '박목월'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1939년 9월, 동아일보에 실린 '문장'지 광고에서 '박목월'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경주에 칩거하며 쓴 시가 뽑혀 등단의 꿈을 이뤘다. 잡지와 고료를 받았다.
해방 이듬해 2월. 목월은 검은 중절모에 본목 두루마기를 걸친 채 대구역에서 기차를 탔다.
을유문화사에서 일하는 박두진을 찾아가는 길. 서울까지는 17시간 걸렸다.
박두진·조지훈 등과 3인 시집을 내기로 했다.
1946년 6월, '청록집'이 '순수시를 지향하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3인
시집'이라는 광고문을 달고 나왔다.
초판 3000부, 정가 30원.
목월은 직장에 충실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이었다.
목월은 직장에 충실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이었다.
1962년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부임해 시를 가르치면서 월간 시지 '심상'을 펴냈다.
1978년 3월 24일,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원효로 자택에 돌아와 쓰러졌다.
평소 건강했던 탓에 시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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