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50) 천상병(1930~1993)
1967년 속칭 동백림간첩사건이 터졌을 때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 시 한 수를 읽으면서 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그는 얼마 뒤에 내 집에 또다시 찾아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 지난번 주신 양주는 제가 한 모금도 못 마셨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이건 비싼 술이니 팔아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옳다'고 하여 저는 맛도 못 보고
그 술을 아내가 팔았답니다."
그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중학 5학년 때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강물'이라는 시를 '문예'라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1952년에는 '갈매기'가 시인 모윤숙의 추천으로 또다시 '문예'에 게재되어
시인으로서의 추천받는 일이 완료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서울상대에 입학하였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학생 때부터 영어에 능하던 그는 미군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영어 서적들을 여러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정식으로 취직하여 직장을 가져 본 것은, 뒤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이 부산시장이었을 때
그의 공보비서로 2년간 근무한 기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밀어닥친 동백림사건이라는 무서운 재앙은 그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려
그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친 술꾼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으나 그 사실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친구들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시들을 유고집으로 발간하였으니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천상병은 언젠가 나를 만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 예수님은 매우 가난하셨지요. 저도 가난합니다."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던 천상병이 목사들보다 훨씬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 한 수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1993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천상병은 훨훨 날아 하늘에 올라가면서 '고얀 놈들아,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한다'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
멀리멀리 구름 헤치고 저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가을날의 하루하루가 처량하게만 느껴지지만
천상병이 살고 간 이 땅이기에 봄은 반드시 온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