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1.10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8>장기려(1911~1995)
1940년대 평양에 있던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취임한 젊은 의사가 명의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 의사가 바로 장기려였다. 그는 해방되고 북한의 제1인민병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할 생각도 못 하고
밀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월남한 사람들이 장기려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였다는 소문을 전해 주었을 때였다.
그를 직접 만나서 한번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정말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셨습니까?"
장기려는 '그렇다', '아니다'라는 대답은 않고 다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무척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중에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나는 '장기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표정이 그렇고 말솜씨가 그렇고 행동거지가 그렇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에서 부유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어서 장기려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된 그해 11월에야 둘째 아들 장가용의 손목을 잡고 단둘이 월남하였기 때문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연세대의 수학 교수 장기원이 그의 사촌이라고 들었다.
미국에 살던 장 교수의 딸 장혜원과 그의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에 여행을 왔던 장기려가 그 조카딸 집에 묵었을 때 장기려가 하는 말이 좀 수상하였다.
"미국에 오면 나는 달을 볼 재미가 없어."
그 말을 의아스럽게 생각한 사위 임순만이 "왜 달을 볼 재미가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월남한 장기려가 남한에서 보는 달은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가 보는 같은 달이지만,
뉴욕에서 보는 달은 그 달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그런 지극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할 때
누구의 가슴인들 뭉클하지 않을 것인가.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는 월남하여 하늘나라로 떠나기까지 45년을 독신으로 살았다.
장기려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큰 회사의 초청을 받아 직원들에게 강연한 적이 있었는데
강연이 끝나고 그 회사에서 수표가 든 봉투를 한 장 건네받았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데 거지 한 사람이 나타나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렸다.
장기려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받은 그 봉투를 그 거지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거리의 천사는 그 봉투를 건네준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받아 가지고 갔는데
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고 은행 창구에 갔더니 그 수표에 적힌 액수를 보고 깜짝 놀란 행원이
'어떻게 이런 큰돈을 수표로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신사 한 분이 이 수표가 든 봉투를 내게 주어서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우선 경찰에 연락하고 그 수표를 추적하니 어느 회사가 의사 장기려에게 강사료로 준 수표가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 회사는 강사료에 더하여 하시는 일에 보태 쓰시라고 좀 큰 금액을 드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수표를 도로 찾아가라는 연락이 장기려에게 전해졌다.
그 수표를 찾으러 가는 며느리에게 그는 당부하였다.
"네가 그 돈을 찾아서 한 푼도 남김없이 그 가난한 사람에게 다 줘야지,
한 푼이라도 네가 집에 가지고 돌아오면 너는 내 며느리가 아니다"라고 엄하게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손목 잡고 월남한 둘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의 교수가 되게 하였다고 들었다.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한 그는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목사 전영창과 함께 복음병원을 거기 세우고
원장으로 취임하여 25년 동안 성심껏 봉사하였다.
1969년 마침내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함으로써
이 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가난한 환자를 돌보기 위하여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였으며,
드디어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창립하여 영세민 구호 활동에 힘을 모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고
성금으로 받은 2만달러는 고스란히 병원에 기금으로 희사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나머지 부산에 옮겨온 평양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모임'이라는 작은 모임을 하나 시작하여 교회 없는 교회를 발족시켰다.
그가 이끌던 '종들의 모임'은 무소유로 일관하면서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기성 교회를 떠난 그는 성경 공부에 힘을 쏟아 해마다 '여름성경공부모임'을 마련하여
나도 어느 해 그 모임에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장기려는 예와 다름없이 예수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기억한다.
그는 1995년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토록 사모하던 하늘나라로 떠났다.
우리는 장기려를 천국으로 환송하였고 천국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천진난만한 미소에서 우리는 여러 번 하늘나라를 보았고
그 미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은 큰 축복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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