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0.19 03:12
문헌상 일본인이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553년이다. 사비에르에게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쓰마 출신의 '베르나르도'가 1553년 리스본으로 건너가 수도사가 되었다는 예수회의 기록이 있다.
이보다 본격적인 유럽 방문은 '덴쇼(天正) 견구(遣歐) 소년 사절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1582년 2월, 4명의 소년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 무역선에 몸을 싣는다.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가 기획하고 규슈의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후원하는 선교 답례 사절단이었다. 인도와 아프리카를 돌아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리스본에 도착한 소년들은 11월 마드리드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왕국의 펠리페 2세를, 이듬해 3월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의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 후 3월 말 로마에 입성한다.
이보다 본격적인 유럽 방문은 '덴쇼(天正) 견구(遣歐) 소년 사절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1582년 2월, 4명의 소년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 무역선에 몸을 싣는다.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가 기획하고 규슈의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후원하는 선교 답례 사절단이었다. 인도와 아프리카를 돌아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리스본에 도착한 소년들은 11월 마드리드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왕국의 펠리페 2세를, 이듬해 3월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의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 후 3월 말 로마에 입성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들에게 일본 땅에서의 복음을 축원(祝願)하는 옥음(玉音)을 전했다. 얼마 후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선종하고 후임 식스투스 5세가 선출되자, 소년들은 신(新)교황 대관식에 참석한다. 동쪽 끝 섬나라에서 온 소년들을 맞이한 것은 웬만한 유럽 왕실 사절에 버금가는 영예와 환대였다.
소년 사절단에 대한 융숭한 대접은 당시 유럽인들이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준다. 일본은 교황청이 공을 들이는 동아시아 선교의 거점이자 이베리아 왕실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중요 교역국이었고, 무엇보다 유럽을 야만인으로 대하는 중국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유럽의 세속·종교 권력자들은 소년 사절단 방문을
일본과의 관계 강화 기회로 여겼다.
한편, 문헌상 최초로 유럽에 건너간 한국(조선)인은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견문록에 등장하는 '안토니오 코레아'이다. 카를레티는 나가사키에 노예로 잡혀온 조선 출신의 소년을 1606년 피렌체로 데려와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역만리에 홀로 남겨진 조선 소년의 심정을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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