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 여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秀頼)를 제압하고 대망(待望)의 일본 통일을 완성한다. 양측이 결전에 들어간 것은 1614년 겨울이다. 도요토미군이 오사카성에서 농성(籠城)에 들어가자, 도쿠가와군은 요새 같은 성 방어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2대 쇼군인 삼남 히데타다(秀忠)가 무리하게 총공격을 감행하려 하자 노회(老獪)한 이에야스가 나선다.
이에야스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기는' 복안을 구상한다. 그해 여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입수한 컬버린포 4문과 세이커포 1문 등 신형 대포가 비장의 카드였다. 영국제 대포는 포르투갈인들이 들고온 불랑기(佛郞機)포보다 사거리와 파괴력이 월등하였다. 유럽에서는 컬버린포로 무장한 영국 해군이 해전 양상을 바꾸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장거리 신형 대포가 공성전에서 갖는 의미를 주목한다.
12월 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적절한 예(禮)를 보이면 군대를 물리겠다고 화친을 제안해놓고는 오사카성에 포화를 퍼붓기 시작한다. 성의 심장부인 혼마루(本丸)가 포격당하고 히데요리의 모친인 요도 도노(淀殿)의 시종들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성안은 공포에 빠진다. 10년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던 난공불락 오사카성의 방어력이 장거리포에 붕괴하자 지도부는 항전과 화친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에야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포격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성 외곽 해자(垓字)를 메우는 조건으로 화약(和約)이 체결되었고, 해자가 사라진 오사카성은 이듬해 도쿠가와
군의 재침(再侵)을 버티지 못했다. 히데요리의 화친 선택은 유화(宥和) 정책이 자멸을 초래한다는 교훈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 가공할 신무기의 위협과 평화의 심리전을 양면으로 구사하며 적의 방어력을 야금야금 무력화하는 이에야스의 집요한 공략 앞에서 히데요리가 항전 의지를 불태운다고 달라질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이 오사카성 함락의 역사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