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9.19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3·끝] 유엔, 대한민국을 승인하다
국내 불안정·국론 분열도 영향
대표단, 이준 열사 묘 참배 뒤 英연방·아랍 진영 집중 공략
1948년 9월 21일에서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 샤요궁(宮)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그 정당성과 대표성을 놓고 맞붙은 '인정(認定) 투쟁'의 격전장이었다. 총 55개 유엔 회원국 중 공산진영은 6국에 불과했으나 상황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국 문제는 미·소 간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이던 영연방과 이스라엘 독립 선언 후 제1차 중동전쟁 중이던 아랍 국가들이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1일 광복 후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낙점했다. 차석대표로 임명된 장기영(훗날 체신부 장관과 서울시장 역임)이 1945년 10월 이승만이 환국할 때 수행 비서였고 대표단의 일원인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과 특사단의 조병옥·정일형이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의 영향 아래 있던 뉴욕한인교회에서 활동한 점을 고려하면 파격이었다. 장면이 외교통이라는 점도 고려됐지만 방점은 교황청의 외교적 지원을 얻는 데 찍혀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여권에는 '바티칸 파견 대통령특사'라는 직함이 병기돼 있었다.
9월 9일 김포비행장을 떠난 유엔총회 대표단이 도쿄와 뉴욕을 거쳐 배편으로 파리에 입성한 것은 유엔총회 개막 하루 전인 9월 20일이었다. 24일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를 의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찬성 47표, 반대 6표였다. 29일에는 총회 상정의 전 단계인 정치위원회에서 다섯 번째로 한국 문제를 토의하기로 정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1일 광복 후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낙점했다. 차석대표로 임명된 장기영(훗날 체신부 장관과 서울시장 역임)이 1945년 10월 이승만이 환국할 때 수행 비서였고 대표단의 일원인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과 특사단의 조병옥·정일형이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의 영향 아래 있던 뉴욕한인교회에서 활동한 점을 고려하면 파격이었다. 장면이 외교통이라는 점도 고려됐지만 방점은 교황청의 외교적 지원을 얻는 데 찍혀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여권에는 '바티칸 파견 대통령특사'라는 직함이 병기돼 있었다.
9월 9일 김포비행장을 떠난 유엔총회 대표단이 도쿄와 뉴욕을 거쳐 배편으로 파리에 입성한 것은 유엔총회 개막 하루 전인 9월 20일이었다. 24일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를 의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찬성 47표, 반대 6표였다. 29일에는 총회 상정의 전 단계인 정치위원회에서 다섯 번째로 한국 문제를 토의하기로 정해졌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접어들 때까지 한국 문제는 상정될 기미조차 없었다. 10월 19일에는 여수에 주둔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등 대한민국의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영향을 끼쳤다. 10월 21일 자 뉴욕타임스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문제는 다음번 뉴욕 유엔총회에서 다루자는 연기론이 솔솔 피어올랐다.
11월 13일 장면은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앞에서 불퇴전의 각오를 다지고 돌아왔다. 장면이 남긴 수첩에는 한국대표단을 적극 지원한 론칼리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와 수하드 파리대주교, 덜레스 미국 대표, 왕스제(王世杰) 중국 대표, 로물로 필리핀 대표 등과 유엔총회 의장인 에바트 호주 대표, 인도 총리 네루 등 영연방 관계자, 시리아·예멘 대표 등 아랍 외교관을 만난 기록이 빼곡하다. 한국 대표단은 중동의 약소국에 대해서는 동병상련의 한국을 외면하지 말라고 호소했고, 분단의 영구화를 이유로 대한민국 승인을 반대하는 인도에 대해서는 인도 역시 인도·파키스탄·실론으로 삼분한 영국의 분할 정책을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논리로 맞섰다.
11월 13일 장면은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앞에서 불퇴전의 각오를 다지고 돌아왔다. 장면이 남긴 수첩에는 한국대표단을 적극 지원한 론칼리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와 수하드 파리대주교, 덜레스 미국 대표, 왕스제(王世杰) 중국 대표, 로물로 필리핀 대표 등과 유엔총회 의장인 에바트 호주 대표, 인도 총리 네루 등 영연방 관계자, 시리아·예멘 대표 등 아랍 외교관을 만난 기록이 빼곡하다. 한국 대표단은 중동의 약소국에 대해서는 동병상련의 한국을 외면하지 말라고 호소했고, 분단의 영구화를 이유로 대한민국 승인을 반대하는 인도에 대해서는 인도 역시 인도·파키스탄·실론으로 삼분한 영국의 분할 정책을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논리로 맞섰다.
유엔총회 회기 종료 6일 전인 12월 6일 정치위원회는 한국과 북한 대표 초청을 놓고 격돌했다. 북한 초청안은 반대 36표, 찬성 6표, 기권 8표로 부결됐고 한국 초청안은 찬성 39표, 반대 10표, 기권 1표로 가결됐다.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과 부수상 홍명희가 이끄는 북한 대표단은 평양을 떠나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지만 프랑스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파리에 올 수 없었다. 반면 12월 7일 한국 대표단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역설하는 장면 단장의 연설을 2층 옵서버석이 아니라 1층 회의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8일 미·중·호주 3국이 제출한 대한민국 승인안과 유엔한국위원단 구성안이 압도적 표차로 정치위원회를 통과했다.
유엔총회 회기 종료를 하루 앞둔 11일 운명의 날은 밝았다. 대한민국 승인안은 앞순위인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토의가 하루종일 이어지면서 날을 넘겨 오전 0시 11분 상정되었다. 공산진영의 의사방해(필리버스터)가 계속되고 빈자리가 늘어가자 오전 2시 20분 의장이 정회와 오후 3시 속개를 선언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호주 출신 오브라이언 주교를 매개로 에바트 의장을 설득한 한국 대표단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동이 트자 한국 대표단은 호텔방 문고리를 두들기며 각국 대표들에게 총회 참석을 호소했다. 오후 5시 8분 대한민국 승인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의 압도적 승리였다. 반면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의 해체를 제안한 소련의 동의안은 찬성 6표, 반대 46표, 기권 3표로 부결됐다.
유엔에서 벌어 진 '인정 투쟁'의 승자는 대한민국이었다. 한국 문제 상정에서 승인까지 전면에서 도운 미국, 막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교황청, 그리고 이 둘의 지원을 얻어낸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전략은 적중했다. 미국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인도와 아랍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낸 한국 대표단의 역량도 압승의 요인 중 하나였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유엔총회 회기 종료를 하루 앞둔 11일 운명의 날은 밝았다. 대한민국 승인안은 앞순위인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토의가 하루종일 이어지면서 날을 넘겨 오전 0시 11분 상정되었다. 공산진영의 의사방해(필리버스터)가 계속되고 빈자리가 늘어가자 오전 2시 20분 의장이 정회와 오후 3시 속개를 선언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호주 출신 오브라이언 주교를 매개로 에바트 의장을 설득한 한국 대표단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동이 트자 한국 대표단은 호텔방 문고리를 두들기며 각국 대표들에게 총회 참석을 호소했다. 오후 5시 8분 대한민국 승인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의 압도적 승리였다. 반면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의 해체를 제안한 소련의 동의안은 찬성 6표, 반대 46표, 기권 3표로 부결됐다.
유엔에서 벌어 진 '인정 투쟁'의 승자는 대한민국이었다. 한국 문제 상정에서 승인까지 전면에서 도운 미국, 막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교황청, 그리고 이 둘의 지원을 얻어낸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전략은 적중했다. 미국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인도와 아랍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낸 한국 대표단의 역량도 압승의 요인 중 하나였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