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2[10] 미 군정 조선경비대가 國軍의 모체… 5만명으로 출발 (조성훈 위원, 김선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8. 23. 15:19



2미 군정 조선경비대가 國軍의 모체5만명으로 출발


조선일보
                             
  •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입력 2018.08.2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0] 국군을 창설하다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이 열린 1948815 아침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용산에 집결했다.

    이들은 세종로 서울소방소 앞으로 이동하여 오후 1시 반경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앞에서 사열식을 거행했다.

    군악대를 선두로 보병대·병참대·통신대·해안경비대 등이 차례로 사열대를 지난 뒤

    종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광복이 되자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경력이 있는 청·장년은

    되찾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을 지키는 군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8월 30일 좌익 세력이 먼저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했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계열도 10월 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1945년 11월 미 군정에 등록된 군사 단체는 30개에 이르렀다.

    사설(私設) 군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소란이 빚어지자

    미 군정은 불편부당의 원칙을 내세워 좌우익의 모든 군사 단체들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경찰력만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은 직접 군대의 창설을 서둘렀다.
    미군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육군공군을 1946년까지 편성하고 해안경비대도 모집해
    모두 5만명 규모로 창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 내에 국방사령부(뒤에 통위부로 명칭을 바꿈)가 출범했다.
    국방사령부는 군사국 산하에 육군부해군부를 두고 38도선 경비와 해상 경비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신탁통치안을 협의하기로 하자
    미 군정은 정식 군대 대신 병력 규모 25000명의 치안군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각 도(道)에 1개 연대씩 경찰예비대를 편성하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자리 잡은 태릉에서 1946년 1월 15일 1연대 A중대가 창설됐다.
    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청주), 8연대(춘천),
    9연대(제주)가 편성됐다.

    미 군정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
    임정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을 상해까지 가서 모셔왔고,
    광복군의 구조와 계급·명칭 등을 수용하려고 했다.


    1948년 8월 15일 오후 서울 세종로에 마련된 사열대 앞에서 미 군정 조선경비대 대원들이 사열식을 거행하고 있다. 단상에는 이날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 요인들이 서 있다. 이들은 다음 날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으로 재편됐다.
    1948815일 오후 서울 세종로에 마련된 사열대 앞에서
    미 군정 조선경비대 대원들이 사열식을 거행하고 있다.
    단상에는 이날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 요인들이 서 있다. 이들은 다음 날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으로 재편됐다. /국사편찬위원회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국방에서 육군 못지않게 해군의 역할이 중요했다.

    해안경비대는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 등이 중심이 돼 "해양 투사는 오라"는 구호 아래 모집한

    70명의 해방병단(海防兵團)이 모태가 되었다.

    해방병단국방사령부로 편입된 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1946년 1월 초 태극기가 나부끼는 진해 앞바다에서 첫 해상 훈련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인 충무공정(艇)을 진수시켜 인천 근해에서 편대 훈련을 했다.

    1947년 가을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조선경비대를 5만명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12월 기존의 9개 연대로 서울·대전·부산에 각각 여단을 창설했고,

    이듬해 4월 추가로 2개 여단이 편성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국군 창설이었다.

    1948년 8월 16일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발표하여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실천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육군해군으로 개칭되었고

    국군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기병·포병·공병·통신·기갑·병참·경리 등 병과의 체계를 갖추었다.

    8월 31일 광복군 선·후배인 유동열 미 군정 통위부장과 이범석 대한민국 국방장관 사이에

    군사 업무가 이양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나타냈다.

    조선경비대국군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만주군·광복군·중국군 등 다양한 출신이 참여하면서

    파벌적 이익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심일체가 돼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또 군에 침투한 상당수 좌익 세력을 솎아내는 숙군(肅軍)이 중요 과제로 떠올랐다.

    군사 장비가 열악하여 부족한 무기를 확보하는 것도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정부 수립 당시 국군육군이 5개 여단, 5만여명이었고 해군은 3000여명이었다.

    1949년 10월 공군이 육군 항공사령부에서 분리 독립했지만 6·25전쟁 전까지 2000이 되지 않았다.


    미 군정은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병력 증강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국방력 강화가 시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병력으론 치안 유지에도 부족하므로 10만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규군 10만명 확보'는 새로 출범한 정부의 당면 목표가 되었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3/2018082300171.html



    創軍의 주역은 유동열·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들


    조선일보
                                 
               
    입력 2018.08.2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무장독립운동 벌인 뒤 臨政 합류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중심이 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미 군정 군사 조직과 대한민국 국방부의 지휘부가 이들로 채워졌다.

    미 군정 통위부장 유동열(1879~1950)은 임정의 군사 지도자 중 가장 선배였다.

    그는 일본 육사에 유학한 뒤 대한제국 장교로 복무하면서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에 참여했다.

    '105인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됐다가 풀려난 뒤 망명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임정을 떠난 뒤에는 러시아·만주·중국 관내(關內)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40년 통합 임정이 발족되자 다시 임정의 군사 정책을 책임지는 참모총장을 맡았다.

    유동열, 이범석, 최용덕, 지청천.
    유동열, 이범석, 최용덕, 지청천.

    조선경비대 사령관 송호성(1889 ~1959)은 광복군 훈련처장과 제5지대장을 역임했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중국으로 가서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군에 근무하다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 후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 사령관이 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되면서 육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이범석(1900~1972) 국방장관은 광복군 제2지대장과 참모장 출신이었다.

    그는 경성고보에 다니다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강무(講武)학교를 졸업한 뒤 무장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청산리대첩에 참여했고 소련군·중국군에 근무하는 등 다양한 군사 경험을 한 뒤

    광복군에 참여했다. 그는 광복 후에는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해 청년운동을 벌였다.

    최용덕(1898~1969) 국방차관은 광복군 총무처장·참모처장을 맡았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해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담했다.

    일찍이 공군의 중요성에 눈떠 중국공군군관학교에 들어가 전투기 조종사가 됐으며

    광복군이 창설되자 불려왔다.

    귀국 후에는 항공부대 창설에 힘썼고 공군이 독립한 뒤 공군사관학교 교장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광복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 (1888 ~1957)은 제헌국회 국방위원장으로 국군의 토대 구축을 도왔다.

    대한제국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광복군 창설 때 사령관이 됐다.

    귀국 후에는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군대에 초급 지휘관을 공급했고,

    제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된 뒤 국민 개병(皆兵) 정신에 입각한 병역법을 발의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3/20180823001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