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방해공작 뚫고 1년 만에 26개국서 '정부 승인' 얻어내
조선일보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18.09.1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2] 승인 외교를 펼치다
1948년 9월 10일 자 조선일보 1면에는 두 개의 중요한 기사가 실렸다.
톱기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을 얻기 위해 파견하는 대표단과 특사단이
9일 오전 김포비행장을 떠나 장도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그 옆에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김일성을 내각 수상으로 선출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특사단은 정사(正使) 조병옥, 부사(副使) 정일형, 경제고문 김우평으로 꾸려졌다.
조병옥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정일형은 미국 드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김우평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광복 후 미군정에서 관료로 근무했다.
모두 영어 실력과 국제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특사단은 한 달여 동안 일본·중국·필리핀·미국·캐나다·영국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승인 관련 협조를 구하는 외교 활동을 펼친 후 10월 17일 파리에 도착했다.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는 국제사회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통해서 탄생했다.
유엔총회의 한국 정부 승인은 유엔 회원국들의 외교적 승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7월 24일 취임사에서
승인의 권리는 다른 나라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유엔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근대 국제정치 체제는 '우리가 주권국가이다'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주권(主權) 개념 자체에 '국가 간 상호 인정과 승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가로서 외교적 승인을 받기 위해 독립 외교를 펼쳤지만
한반도라는 영토 내의 주민에 대해 실효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독립 외교의 중심에 있었던 이승만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갖고 있었다.
조병옥 특사단은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55개국을
남미·중동·영(英)연방·동남아시아·소련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한국 승인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다.
이 방안은 유엔총회가 열린 파리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을 효율적으로 접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냉전 상황에서 소련이 이끄는 공산권의 반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소련은 한국 승인 방해 공작에 적극 나섰다.
스탈린은 1948년 9월 17일 소련 유엔대표단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폐지, 한국 대표 초청 반대, 북한 대표 초청'을 관철하라는 극비 지령문을 보냈다.
그리고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막고 북한 정권이 승인받도록 총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외교적 승인을 얻기 위해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했다.
1948년 8월 12일 미국은 한국 정부의 순조로운 출발과 유엔 승인을 돕기 위해
한국 정부를 '사실상 승인(de facto recognition)'하고
대사급 한국 주재 특별 대표로 무초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정부도 같은 날 한국 정부를 사실상 승인하고 대사급의 특별 대표를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함께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적 승인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와 달리 영국·호주·캐나다·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유엔총회의 결정이 있기 전에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사실상 승인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자유 진영 내 입장 차이로 잘못하면 유엔총회에서 한국 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병옥 특사단과 미국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영연방 국가들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미국과 중국의 조치에 반대하지 않기로 입장을 바꿨다.
영연방의 입장을 대변하던 캐나다는
자국을 방문한 한국 특사단에 한국 정부 승인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적 승인 과정에서 큰 걸림돌이 제거됐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정부를
'자유선거에 의해서 수립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 직후인 1949년 1월 1일 미국이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승인했고, 중국은 1월 4일 승인했다.
뒤이어 영국(1월 18일), 캐나다(4월 9일), 호주(8월 15일) 등 영연방 국가도 한국을 승인했다.
그리고 프랑스(2월 15일), 필리핀(3월 3일), 교황청(4월 13일) 등 모두 26개국이 그해 말까지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위대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직후부터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으려는 한국인의 외교적 노력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의 승인 외교를 통해서 결실을 보았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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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 파견 외교관, 독립운동가 출신이 많아
조선일보
입력 2018.09.1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駐中대사 신석우 前조선일보 사장, 駐日공사는 정한경·정환범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 승인한 직후인 1949년 1월 6일
유엔총회 대표단장이었던 장면이 초대 주미(駐美) 대사로 임명됐다.
장면은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천주교 평양교구와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정계에 입문했다.
또 하나의 우방이었던 중화민국 대사로는 1949년 8월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임명됐다.
일본 유학 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귀국한 그는
1924년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해 민족지로서의 발판을 다졌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1931년 5월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신석우 주중(駐中) 대사는 8월 25일 중화민국 정부에 신임장을 제정했고
10월 국공(國共) 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가 광둥(廣東)에서 대만으로 이전하자 함께 옮겨갔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일본은 국교가 단절됐지만
교포가 많고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도 도쿄에 있어 외교 업무가 중요했다.
1949년 1월 주일대표부가 설치됐고, 독립운동가 정한경이 초대 주일(駐日) 공사로 임명됐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안창호·이승만 등과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위원을 역임했다.
정한경이 사임하자 후임에는 역시 독립운동가 정환범이 임명됐다.
영국과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에는 공사관이 개설됐다.
주불(駐佛) 공사는 1949년 6월 기업인 출신인 공진항,
주영(駐英) 공사는 1949년 11월 역시 기업인 출신인 윤치창이 각각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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