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책]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이한수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8. 25. 15:09

레닌이 정신 질환을 앓은 이유몸에 박힌 총알 탓?


조선일보
                             
             
입력 2018.08.25 03:00

에피소드로 엮은 수술의 역사

저격당한 케네디 응급 수술하느라총알 입구 확인 못해 음모론 생겨

범인 오즈월드도 같은 의사가 집도

'메스를 잡다'
메스를 잡다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제효영 옮김|을유문화사|488쪽|1만9800원

살면서 제 몸에 칼 한 번 대지 않는 행운을 누리는 이는 이제 많지 않다.
백세 시대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평균 수명이 짧아
신경계 질환이나 암 같은 난치병 발병 전에 세상을 뜨는 사람이 더 많았다.

네덜란드 현직 외과 의사가 쓴 수술의 역사다.
이 쉰 살 서양 의사는 히말라야와 티베트 같은 전 세계 산천(山川) 돌아다니길 좋아했기 때문인지
사실과 의견을 절묘하게 버무리는 필력(筆力)이 대단하다.

외과 수술사(史)에 기록될 옛 사건부터 유명 인사의 수술 뒷얘기까지
에피소드 28건을 각각 15쪽 안팎 길지 않은 분량으로 정리해 엮었다.
의학 전문용어가 나오지만 친절한 설명 덕분에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유명 인물의 긴박한 수술 이야기가 먼저 눈길을 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암살범 오즈월드 수술은 같은 의사가 집도했다.
의사 이름은 맬컴 올리버 페리. 당시 서른네 살이다.
댈러스에서 총을 맞은 케네디는 뇌 일부가 날아간 채로 8분 걸려 파크랜드기념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페리는 메스를 잡고 먼저 기관 절개술(tracheotomy)을 실시했다.
말 그대로 목을 잘라서(-tomy) 기관(trachea)을 통해 공기가 폐로 전달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대통령은 곧 워싱턴 해군 병원으로 인계됐지만 사망했다.
이때 페리를 비롯한 댈러스 병원 의료진과 군 병원 의사 간 의견 교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응급 수술을 담당한 페리를 비롯한 의사 열 명은 대통령의 등쪽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페리는 몰려든 기자 앞에서 목에 있던 총상을 총알이 진입한 상처로 언급했다.
그러나 범인 오즈월드가 총을 쏜 지점은 대통령의 뒤쪽이었다.
페리가 기관 절개술을 실시한 목의 총알 구멍은 뒤에서 쏜 총알이 빠져나간 자리로 부검을 통해 확인됐지만, 많은 사람은 응급 수술을 맡은 첫 의사 페리가 한 말을 더 믿었다.
음모론이 광범위하게 퍼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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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 외과의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의 저작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에 실린 삽화들.
베살리우스는 근대 해부학 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을유문화사
사건 이틀 뒤인 일요일.
암살범 오즈월드는 경찰 호송 중 잭 루비라는 청년이 쏜 총알에 맞아 응급실에 실려 왔다.
호송 장면은 TV 중계 중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살인 장면이 생중계됐다.
이날 공교롭게도 페리가 당직 근무 중이었다.
오즈월드 수술은 마취 없이 진행됐다. 이미 몸은 통증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였다.
수술 시간은 85분. 의료진이 아닌 세 명이 녹색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에 들어와 오즈월드 귀에 대고
"당신이 한 짓이지?" 거듭해 물었다.
수사 당국은 그때까지 자백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소비에트 혁명가 레닌의 뇌졸중 수술 이야기도 흥미롭다.
레닌은 혁명 직후인 1918년 8월 30일 한 젊은 여성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목 오른쪽 아래와 왼쪽 아래에 총알이 박혔다. 수술은 보류됐다.
의식이 있던 레닌은 총알을 그냥 놔두라고 했고, 3주 후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레닌은 빈번히 정신 질환을 앓았다. 원인은 몸속 총알 때문이라고 판단됐다.
1922년 4월 왼쪽 목의 총알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 이후 뇌경색 증상이 발발했다.
총알 납 성분이 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레닌의 시신은 (현재) 방부 처리되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총알이 시신에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술을 거부해 사망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자메이카 출신 세계적 음악가 밥 말리는 엄지발가락을 자르면 살 수 있었다.
처음엔 축구하다 다쳐 발가락에 통증이 생긴 줄 알았다. 병명은 악성 흑색종. 피부암 일종이다.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는 진단이 있었지만 밥 말리는 수술을 거절했다.
암은 림프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2년 후 밥 말리는 사망했다.

성기의 포피 문제로 7년간 마리 앙투아네트와 진정한 부부가 되지 못한 루이 16세,
비만 증세로 위 축소 수술을 받는 등 특이한 질환에 시달렸던 역대 교황들,
대동맥류 수술을 받고도 예상보다 7년을 더 살아 생명의 상대성을 입증한 아인슈타인,
스스로 칼을 들어 달걀만 한 방광 결석을 빼낸 17세기 네덜란드 대장장이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4/20180824034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