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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폭염이 모두에게 평등해지는 순간이 진짜 재앙 (권지예, 조선일보)

colorprom 2018. 8. 23. 16:30


[인문의 향연] 폭염이 모두에게 평등해지는 순간이 진짜 재앙

마크 라이너스'6도의 멸종'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솔라'


조선일보
                             
  • 권지예 소설가
    •          
    입력 2018.08.23 03:10

    지구가 조금만 더 뜨거워져도 곡창지대 파멸·섬나라 침몰 등 인류 전체의 생존이 위협받게 돼
    대재앙에 대한 근심 걱정 없이 시원한 바람에도 행복해지는 자연의 질서 아직은 믿고 싶어

    권지예 소설가
    권지예 소설가



    올여름 폭염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8월 15일까지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48이었는데 이는 연평균 폭염 사망자 수의 4.5였다고 한다.

    온열 질환자 수는 4300이 넘었다.

    실외는 숨 막히는 사우나 지옥이었고 태양빛과 열기는 인간과 동식물의 생명을 공격하고 위협했다.

    방어용 무기라 할 수 있는 선풍기나 에어컨에만 의지하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절기는 속일 수 없는지, 폭염이 살짝 꼬리를 내리는 것 같다.

    오늘은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공기나 햇빛은 늘 평등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폭염이나 미세 먼지에 취약한 계급이 존재한다.


    물론 오래지 않아 폭염이나 미세 먼지가 지구상의 누구에게든 평등해질지 모른다.

    좀 과장하면 대멸종이라는 지구의 대재앙을 예고하는 징후가 점점 다가온다.

    올해 이 폭염이 올해만의 예외적 이벤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크 라이너스'6도의 멸종'이란 책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섭씨 1도씩 올라갈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탐구한 대재앙 시나리오 분석서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에 따르면
    앞으로 100년 동안 지구 온도가 섭씨 6정도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최근 30년 동안 이미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섭씨 1도가 올랐다는데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

    1도만 더 높아져도 대평원의 곡창지대들이 파멸하고, 모래폭풍이 내륙 곳곳을 유린하고, 산호초가 붕괴되고, 극지대의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저지대의 섬나라들이 침몰하는 재앙이 시작된다.

    온도가 상승할수록 재앙은 모든 자연환경과 인간의 삶과 생존을 도미노처럼 쓰러뜨린다고 한다.

    IPCC는 "6도만 높아지면 지구가 뒤집어지는 대멸종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솔직히 아직까지 뜨거운 맛을 덜 봐서 그럴까. 과장된 이론으로 치부하고 싶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여기 이 문제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과학자가 있다.

    지구의 이런 위기는 불의와 재앙에 열 올리는 정치적인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들에게 젖과 생명과 기쁨을 준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에게 세상의 종말은 결코 실현되는 일 없이 늘 임박해 있다가, 막상 때가 되면 닥치지 않았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비정치적'인 그는 이거 말고도 생각할 게 너무 많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솔라'에 등장하는 주인공 마이클 비어드 얘기다.

    그는 운 좋게 노벨상을 수상한 영국의 물리학자인데, 연구다운 연구를 중단한 지 20년이 넘고,

    그 타이틀로만 적당히 살고 있는 속물이다.

    돈과 특히 여자에게 관심 많은 바람둥이다.

    다섯 번째 결혼한 아내 퍼트리스는 5년간 열한 번이나 바람 피운 남편을 응징하기 위해

    건축업자 파핀과 맞바람을 피운다.

    마이클 비어드는 불륜남을 찾아가지만 그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고,

    때마침 기후변화에 관심 있는 예술가들과 과학자들로 구성된 북극 견학 파견단에,

    표면적으로는 '지구온난화를 몸소 확인'하러 참석한다.

    그곳에서 좌충우돌 실수를 했지만 그의 인생은 파견단에서 귀가한 날부터 크게 달라진다.

    아내 없는 집에서 목욕 가운을 걸친 한 남자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는 후배 과학자인 톰 올더스였다.

    용서를 빌려고 급히 뛰어 오던 올더스가 미끄러져 갑자기 숨지자,

    비어드는 젊은 천재 과학자인 올더스의 미(未)발표 연구 자료를 훔쳐 계속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급기야 그는 애초 올더스가 고안했던, 태양열을 이용한 '인공 광합성'이라는 새로운 재생에너지로

    '지구를 지키려는' 과학자가 된다.


    올더스의 아이디어를 훔쳐 특허를 따고, 컨소시엄을 조직하고,

    벤처자금을 끌어들여 세계적인 영웅까지 된 것이다.

    비어드의 사생활은 엉망이지만, 그가 계속 성공하기 위해 지구는 더 뜨거워져야 한다.

    걱정하는 동업자에게 비어드는 말한다. "토비, 잘 들어요. 지구온난화는 대재 앙이에요. 안심해요!"

    우리 주변에도 비어드처럼 대재앙에 안심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과연 행복할까.


    아직 대재앙은 멀고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은

    시원한 한줄기 바람에도 잠시 행복해진다.

    처서가 지나면 바람결이 달라지겠지.


    변함없는 자연의 질서를 아직은 믿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2/20180822038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