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2[7]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 "臨政 법통 계승" (이택선 교수, 이선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25. 14:16



2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 "臨政 법통 계승"


선일보
                             
  • 이택선 한국외국어대 LD학부 외래교수
    •          
    입력 2018.07.25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7] 초대 정·부통령을 선출하다

    부통령 선거는 2차까지 실시…

    독촉회·한민당 지지한 이시영, 무소속이 추대한 김구에 앞서

    이택선 한국외국어대 LD학부 외래교수
    이택선 한국외국어대 LD학부 외래교수


    제헌헌법을 공포한 뒤 할 일은 정·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을 구성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제헌헌법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도록 돼 있었다.

    조선여론협회는 1948년 6월 23일 서울 시내 다섯 곳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초대 대통령으로 누가 적합한지를 조사했다. 1위는 1024표(40.9%)를 얻은 이승만이었고, 2위는 568표(22.7%)를 획득한 김구였다. 3위와 4위는 각각 118표(4.7%)와 89표(3.5%)의 지지를 받은 서재필과 김규식이었다.


    7월 11일에 김구를 면담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한국 주재 총영사 유어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 유어만은 대통령 선출이 유력하던 이승만에게 김구의 부통령 출마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동아시아에 다가올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의 우파 지도자인 김구와 이승만이 힘을 합치기를 바랐다.


    유어만과의 대담에서 김구는 이승만이 한국민주당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정부에 참여한다면 심각한 갈등이 불가피하므로 재야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어만은 7월 13일 김구가 정치를 재개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고 중국 외교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구는 7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다는 소문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을 향해 미군과 소련군 철수 이후 남북협상에 참여한 단체들을 중심으로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7월 24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 모습. 오전 10시 15분부터 한 시간 동안 거행된 취임식에는 제헌 국회의원 전원,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 간부, 사회단체 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등이 참석했다.
    1948년 7월 24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 모습. 오전 10시 15분부터 한 시간 동안 거행된 취임식에는 제헌 국회의원 전원,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 간부, 사회단체 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등이 참석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드디어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는 무기명 투표로 진행됐고 국회 내 주요 세력들이 후보를 추대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은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이시영을 지명했다. 반면 무소속구락부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부통령 후보로 지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196표 가운데 180표를 얻어 92.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차점자는 13표를 얻어 6.63%의 득표율을 보인 김구였다. 3위는 2표를 획득한 안재홍이었고, 서재필도 1표를 얻었지만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무효 처리됐다.

    이어진 부통령 선거는 2차 투표까지 실시됐다. 1차 투표는 6명의 후보자가 경합을 벌였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 핵심인사인 김구와 이시영이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이시영은 조선왕조에서 고등법원판사와 법원민사국장을 역임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 대부호였던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쾌척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지낸 그는 광복 후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해 신익희·이청천 등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했고 이승만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국회부의장으로 김동원을 당선시킨 한국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엔 경쟁력 있는 후보를 출마시키지 못했고 이시영을 지지하게 됐다.

    1차 투표 결과 1위는 113표를 얻은 이시영이었고 김구가 65표로 2위를 기록했다. 뒤를 이어 북한에 억류돼 있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이 10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오세창이 5표를 얻었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은 각각 3표와 1표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선에 필요한 132표를 얻은 후보자가 없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시영 부통령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시영 부통령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2차 투표는 이시영과 김구의 대결로 압축됐다. 김구가 1차보다 3표가 적은 62표를 얻은 반면, 이시영은 20표가 더 많은 133표를 획득해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독촉과 한민당의 연합세력이 무소속을 누른 것이다.

    7월 24일 오전 10시 15분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의 취임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 역시 새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양분된 국토를 통일하고 산업을 재건해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함 을 역설했다. 오세창의 기쁨에 넘쳐 울음 섞인 축사와 김동원 국회부의장의 만세 삼창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빗방울 속에서도 세종로까지 가득 차 있었던 군중은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당시 언론은 대한민국 정·부통령 취임을 통해 마침내 한민족이 잃었던 조국을 되찾았으며 3·1 기미독립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5/2018072500099.html


                             

    서재필 대통령 추대 운동했는데… 본인이 固辭

    조선일보
                                 
               
    입력 2018.07.25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7] 초대 정·부통령을 선출하다


    대통령 선거 3위 한 안재홍은 조선일보 사장 지낸 민족운동가

    서재필, 안재홍
    서재필, 안재홍

    제헌국회가 문을 연 직후인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와 미국 유학파 인사들이 원로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대통령 추대 운동을 시작했다. 정일형·백인제·이용설·최능진 등이 주도한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 간원문'은 "위대한 영도자를 갈구하는 현실에 비추어 각하의 출마를 갈망한다"며 미국 국적인 서재필에게 '국적을 환원해 조국의 영도자로 헌신할 것'을 요청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주경야독으로 의사가 된 그는 갑오경장 뒤 개화파 내각의 요청으로 1895년 말 귀국해 '독립신문' '독립협회'를 만들어 국민을 계몽하는 한편 배재학당 강사로 청년을 교육했다. 이승만도 이때 서재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시 정권을 잡은 수구파 정부의 압력으로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서재필이 49년 만인 1947년 6월 환국한 것은 김규식의 건의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불화하던 하지는 독립운동 선배인 서재필이 그를 견제할 것으로 기대했다. 미군정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하지 사령관을 자문하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을 계몽했다.

    추대 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지는 등 거듭되는 요청에도 서재필은 고령을 이유로 대통령 출마를 사양했고 7월 4일 기자회견을 열어 불출마 의사를 공식화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9월 11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이어 득표한 안재홍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일보 사장·주필과 신간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아홉 차례나 투옥돼 7년3개월간 옥고를 치른 대표적인 국내파 민족 운동가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으로 정치 일선에 나선 그는 1947년 2월 미군정이 만든 남조선 과도정부의 민정장관을 맡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과도기의 행정을 이끌었다. 그는 비타협적 항일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순정(純正) 우익'이 신국가 건설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재홍은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의 대의 (大義)를 인정하면서도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였다. '차선(次善)으로서의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명한 그는 5·10 총선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1950년 5·30 총선에서 경기도 평택에서 출마해 당선됐지만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 때 납북됐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5/2018072500093.html


    최성관(su****)
    2018.07.2516:04:55신고
    광복 때나 지금이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좌파들의 시기심은 한이 없다. 광복 때 북에 소련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들어왔던 김일성을 장군이라고 부르는 바보들이나, 그의 주체사상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좌파들이나 현 문빠들의 정신병은 치료할 길이 없다. 이승만은 영원한 광복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요, 인격자요, 미래를 보는 현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혜안을 가진 인물을 찾지 못할 것이다. 좌파들이 그를 미워하는 것은 오직 질투 때문이다.
    우종수(qk****)
    2018.07.2513:55:14신고
    일제 통치가 끝이 없을것 같은 시대에 많은 애국인사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국적을 일본인으로, 중국인으로 바꿀때 끝까지 무국적자로 남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이분이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독립투사는 중국 국적자이거나 나중에 변절했다고하는 일본 국적자이다 너무나 받들고 배울점이 많은 애국자이시며, 건국의 아버지이시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의 영웅 링컨보다 더 많은 영웅담과 자랑거리가 있으신 분이다
    유재운(yjwo****)2018.07.2510:14:17신고
    4.19로 물러난 이승만을 군사정권이 굳이 부각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어 등장한 소위 문민정부도 마찬가지였고 민주당 정권은 아예 최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심지어 좌파들로 구성된 민족문제 연구소에서는 천하의 폐륜으로 몰아갔다. 역사적 기억의 왜곡이다. 한 나라의 건국 대통령을 이지경으로 패대기 치는 나라는 세계에 없을거다. 그는 왕이 다스리던 조선시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반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 시대 최고의 선각자 였다. 그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맥을 쌓은 유명인사였다. 그 인맥으로 건국이후 6.25를 거쳐 전후복구까지 막대한 도움을 받았다. 당시 동남아 대부분의 국가가 공산주의로 흘러갔던 시절에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는 것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자유당이 부정선거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책임져야 할 일이고 그것대로 비판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한 쪽으로 몰아가서 그의 업적이 터무니 없이 폄하되는 것은 형평성에서 한참 벗어났다
              이상규(paxs****)2018.07.2510:28:46신고

    유재운 선생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누구에게나 공과가 있기 마련인데, 공이 70이라면 과는 30 정도로 보는 것이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과만 과도하게 부격시켜 초대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5/20180725000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