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7] 초대 정·부통령을 선출하다
부통령 선거는 2차까지 실시…
독촉회·한민당 지지한 이시영, 무소속이 추대한 김구에 앞서
제헌헌법을 공포한 뒤 할 일은 정·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을 구성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제헌헌법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도록 돼 있었다.
조선여론협회는 1948년 6월 23일 서울 시내 다섯 곳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초대 대통령으로 누가 적합한지를 조사했다. 1위는 1024표(40.9%)를 얻은 이승만이었고, 2위는 568표(22.7%)를 획득한 김구였다. 3위와 4위는 각각 118표(4.7%)와 89표(3.5%)의 지지를 받은 서재필과 김규식이었다.
7월 11일에 김구를 면담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한국 주재 총영사 유어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 유어만은 대통령 선출이 유력하던 이승만에게 김구의 부통령 출마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동아시아에 다가올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의 우파 지도자인 김구와 이승만이 힘을 합치기를 바랐다.
유어만과의 대담에서 김구는 이승만이 한국민주당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정부에 참여한다면 심각한 갈등이 불가피하므로 재야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어만은 7월 13일 김구가 정치를 재개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고 중국 외교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구는 7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다는 소문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을 향해 미군과 소련군 철수 이후 남북협상에 참여한 단체들을 중심으로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드디어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는 무기명 투표로 진행됐고 국회 내 주요 세력들이 후보를 추대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은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이시영을 지명했다. 반면 무소속구락부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부통령 후보로 지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196표 가운데 180표를 얻어 92.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차점자는 13표를 얻어 6.63%의 득표율을 보인 김구였다. 3위는 2표를 획득한 안재홍이었고, 서재필도 1표를 얻었지만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무효 처리됐다.
이어진 부통령 선거는 2차 투표까지 실시됐다. 1차 투표는 6명의 후보자가 경합을 벌였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 핵심인사인 김구와 이시영이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이시영은 조선왕조에서 고등법원판사와 법원민사국장을 역임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 대부호였던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쾌척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지낸 그는 광복 후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해 신익희·이청천 등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했고 이승만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국회부의장으로 김동원을 당선시킨 한국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엔 경쟁력 있는 후보를 출마시키지 못했고 이시영을 지지하게 됐다.
1차 투표 결과 1위는 113표를 얻은 이시영이었고 김구가 65표로 2위를 기록했다. 뒤를 이어 북한에 억류돼 있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이 10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오세창이 5표를 얻었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은 각각 3표와 1표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선에 필요한 132표를 얻은 후보자가 없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는 이시영과 김구의 대결로 압축됐다. 김구가 1차보다 3표가 적은 62표를 얻은 반면, 이시영은 20표가 더 많은 133표를 획득해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독촉과 한민당의 연합세력이 무소속을 누른 것이다.
7월 24일 오전 10시 15분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의 취임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 역시 새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양분된 국토를 통일하고 산업을 재건해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함
을 역설했다. 오세창의 기쁨에 넘쳐 울음 섞인 축사와 김동원 국회부의장의 만세 삼창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빗방울 속에서도 세종로까지 가득 차 있었던 군중은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당시 언론은 대한민국 정·부통령 취임을 통해 마침내 한민족이 잃었던 조국을 되찾았으며 3·1 기미독립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게 됐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