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8] 첫 내각을 구성하다
이틀에 나누어 장관 13명 발표… 서울·영남 각 4명, 충청·호남 1명
이윤영은 자신이 이북 출신인 데다가 이승만에게 배신감을 느낀 한민당의 반란 표로 이런 일이 빚어졌다고 회고했다. 한민당으로서는 초대 국무총리가 자기 당 당수인 김성수의 몫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데다가 목사인 이윤영의 친(親)기독교적 노선도 마음 내키지 않았다. 당초에 이승만은 김성수의 능력과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재무부장관 정도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한민당으로서는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 거부했다.
국내 민족 진영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와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을 놓고 고민하다가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지명함으로써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그에게는 이범석을 통하여 임정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내파 민족주의 세력의 도전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8월 2일 이범석의 국무총리 승인안이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국회에서 어렵게 가결됐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3일에 국방부장관 이범석(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 법무부장관 이인, 농림부장관 조봉암, 교통부장관 민희식, 내무부장관 윤치영, 문교부장관 안호상, 사회부장관 전진한을 임명했다. 이어 이튿날인 4일 상공부장관 임영신, 체신부장관 윤석구, 외무부장관 장택상, 공보처장 김동성, 법제처장 유진오를 임명했다. 내각을 이틀에 걸쳐 발표한 것 자체가 이승만의 고심을 보여준다.
이 같은 이승만의 선택에는 그 나름의 애로와 고충이 있었다. 독립투사로서의 후광만으로 정치를 하기에는 그의 핵심 지지 세력인 재미(在美) 그룹의 실체와 기반이 허약했고, 또 그들 모두가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외 투쟁에 못지않게 내부 알력에 시달렸다. 그러던 차에 미주 출신인 장덕수를 매개로 하여 국내의 보성전문 그룹과 손을 잡았을 때 그에게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 정국의 격정 속에서 한민당에 대한 거부 정서가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승만으로서는 그의 중심 지지 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만으로는 정국을 주도할 수 없게 되자 국회에서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무소속과 한민당은 물론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청년단·민족청년단·농민연맹 등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 한민당보다도 더 세력이 막강한 무소속의 설득을 윤치영에게 일임함으로써 가까스로 조각을 완수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한국현대사 연구를 지배하고 있는 몽환적인 전제, 즉 이승만이 한민당을 기반으로 하는 친일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을 출범·유지했다는 주장은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첫 내각 13명 가운데 명시적으로 친일 인사로 볼 수 있는 인물은 두 명, 선대가 친일이었던 인물은 한 명 정도였다.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서 이범석·김도연·이인·조봉암 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다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이 당초부터 친일파에 기댄 것은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정권의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의 차이이며,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