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3>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중앙일보] 입력 2008.12.11 01:13 수정 2008.12.11 16:07 |
종합 25면 지면보기 #풍경1 : 겟세마네 동산. 죽음을 예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그리고 홀로 앞으로 나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쿨~쿨’ 잠이 들고 말았죠.
돌아와서 예수는 말했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있어라.
깨어서 기도를 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가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또 잠들고 말았죠.
예수는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시간이 되었다.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나’에 머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깨어나
#풍경2 : 기독교 영성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는 ‘머무름’에 대해서 말했죠.
“우리는 일정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 그래서 무주(無住)이다.
머무를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일 뿐이다. 우주 공간이 우리의 주소이다.
사람은 모두 머무를 곳을 찾는다. 그러나 머물면 썩는다.
주(住)라야 살 것 같지만 무주(無住)라야 산다. 머무르면 그쳐 버린다.
산다는 것은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풍경3 : 당나라 때 가난한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꾸렸죠.
어느 날, 나무꾼이 객점에 나무를 갖다놓고 나올 때였죠. 한 손님이 읽는 불경 소리가 들렸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의 한 대목이었죠.
그 구절을 듣는 순간 나무꾼은 크게 마음을 깨쳤습니다. 그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결국 그는 깨달음을 얻고,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선맥(禪脈)’을 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입니다.
예수는 “깨어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깨어있음’이란 뭘까요. 졸린 눈을 억지로 참으며 눈꺼풀을 버티고 있는 게 ‘깨어있음’일까요. 예수의 메시지는 그리 간단치 않죠.
그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를 하라”(마가복음 14:38)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잠이 듭니다. 그렇게 잠이 드는 순간, 우리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우리는 대체 어디를 향해 잠이 드는 걸까요.
그렇죠. 선악과의 후예인 ‘나’ 속으로 잠이 드는 거죠.
거기는 가짐의 유혹, 집착의 유혹, 욕망의 유혹이 끝없이 넘실대는 곳이죠. 그래서 예수는 ‘나’ 속으로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라”고 말한 겁니다.
예수의 ‘깨어있음’을 다석 유영모는 ‘무주(無住)’로 표현했죠.
머물지 말라는 거죠. ‘나’라는 에고에 머물지 말라는 겁니다.
“엉?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에고에 머물지 말라고? 그럼 죽으란 거야?”라는 반박도 나올 법하죠.
그런데 다석은 “머물러야 살 것 같지만, 머물지 않아야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보세요. 우리는 진정 어디에 거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나’ 속에 머물고, ‘나’ 속에 거하는 거죠.
‘나’속에 거하는 이는 결코 ‘예수’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석은 “머물면 썩는다”고 말한 겁니다.
붓다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머무는 곳에 집착이 있고, 집착하는 곳에서 우리는 늘 머물기 때문입니다.
‘나’에 머물면 ‘나의 마음’이 나오고, ‘나’에 머물지 않으면 ‘부처의 마음’이 나오는 거죠.
혜능 대사는 그걸 깨친 거죠.
그러니 “깨어있어라”는 예수의 메시지도, “머물지 말라”는 붓다의 메시지도 우리에겐 ‘길’입니다.
그 길에 ‘썩지 않는 법’이 있기 때문이죠.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