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2> 별 하나, 나 하나

colorprom 2008. 12. 4. 15:1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2>

별 하나, 나 하나

      


#풍경1 : 밤하늘을 보세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죠.
어떤 별은 아주 밝고, 또 어떤 별은 아주 희미하죠.
그런데 아세요?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실은 하나의 은하일 수도 있답니다.
1000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인 은하 말이죠. 그 은하가 너무나 멀어서 ‘별 하나’처럼 보이는 거죠.

내 안의 블랙홀 찾아야 창조 위한 파괴도 가능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약 1250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놀랍죠. 이 우주의 크기는 정말 끝이 없네요.
그런데 은하의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처음에 블랙홀은 이론상의 존재였죠.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이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했습니다.

처음에 블랙홀은 ‘공포의 대상’이었죠. 그래서 별명도 ‘우주의 식인종’이죠.
주위의 물질을 모두 빨아들이니까요. 심지어 빛까지도 말이죠.
그래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은하안드로메다의 중심에서 블랙홀이 확인됐을 때
과학자들은 깜짝 놀랐죠.
블랙홀이 수억 광년 떨어진 ‘멀고 먼 공포’가 아니라, 바로 ‘이웃의 공포’로 다가온 거죠.

그런데 안드로메다 뿐만 아닙니다.

지구가 속한 은하의 중심에도 블랙홀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은하의 중심에 블랙홀이 있다는 거죠.

작은 은하에는 태양의 수백만 배 크기인 블랙홀이, 큰 은하에는 태양의 수십억 배 크기인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미국 UCLA의 안드레아 게즈(물리학·천문학) 교수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도 ‘거대 블랙홀’이 존재한다. 다만 블랙홀이 휴면 상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주학자와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거대 블랙홀의 중심에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리학의 모든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중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완전한 수수께끼다.

그것을 풀기 위해선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물리학이 필요하다”

“은하와 블랙홀은 탄생 때부터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본다.”

#풍경2 : 과학에만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종교에도 ‘블랙홀’이 있습니다.

또 종교에만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니죠. 내 안에도 ‘블랙홀’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의 세포로 이뤄져 있죠. 그 세포 하나하나가 실은 ‘별’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60조의 별이 모인 거대한 은하죠.

그런데 그 ‘별(세포)’마다 욕망이 묻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인간의 유전자를 통해 이어지는 가짐과 집착의 기질이죠.

그 숱한 ‘별’에서 욕망을 하나씩 털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 털어진 욕망은 어김없이 블랙홀 속으로 ‘쑥쑥’ 들어가죠.

그리고 나중에 ‘나’라는 은하계의 마지막 욕망까지 블랙홀 속으로 ‘쑤∼욱’ 들어갈 때

우리는 ‘붓다’를 만나는 겁니다. 거기가 바로 ‘공(空)’의 자리죠.

그래서 붓다는 말했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色)’이 뭔가요.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죠. 저 숱한 별들과 은하의 풍경이죠.

그뿐인가요. 내가 디딘 땅, 곁에 선 나무, 지저귀는 새 등 모든 형상이 바로 ‘색(色)’이죠.


그럼 ‘공(空)’은 뭘까요. 그 모든 ‘색(色)’이 나온 바탕이죠.

색(色)과 공(空)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통로. 선(禪)의 세계에선 그게 바로 ‘블랙홀’입니다.


우주에는 ‘블랙홀’만 있는 게 아닙니다. ‘화이트홀’있죠.
모든 걸 빨아들이는 게 ‘블랙홀’이라면, 모든 걸 내뱉는 게 ‘화이트홀’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공간에서 화이트홀의 존재를 아직 입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禪)에선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둘이 아닙니다.
‘색’이 ‘공’으로 빨려들어갈 때는 ‘블랙홀’이 되고, ‘공’이 ‘색’으로 나타날 때는 ‘화이트홀’이 되는 거죠.
하나의 통로를 이쪽에서 보느냐, 아니면 저쪽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다시 보세요.
‘색’이 ‘공’으로 빨려들어갈 때는 ‘파괴’가 되고, ‘공’이 ‘색’으로 나타날 때는 ‘창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파괴와 창조는 둘이 아닙니다. 들숨의 자리와 날숨의 자리가 하나이듯이 말이죠.

그러니 명심해야죠.
‘나’라는 은하를 비우는 수행은 ‘파괴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작업’입니다.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2> 별 하나, 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