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8> 가장 큰 계명은 가장 큰 고개

colorprom 2008. 6. 5. 11:5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8>

가장 큰 계명은 가장 큰 고개

                

      



#풍경: 율법 학자가 시험 삼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5~40절)

마음·목숨·뜻을 다하라
‘다함의 순간’ 고개 넘어


자주 읽히는 성경 구절이죠. 사람들은 밑줄을 긋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대목,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목에 밑줄을 치죠.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하죠. ‘이번 주에도 가장 큰 계명을 지켰구나’라고 말이죠.

‘현문우답’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밑줄을 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왜 이걸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어째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는 걸까요.


‘현문우답’은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리고 ‘다함’이란 말에 주목합니다.

 ‘네 마음을 다함, 네 목숨을 다함, 네 뜻을 다함.’ 왜냐구요.

그 ‘다함’이란 단어에서 ‘열쇠’가 만져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열쇠냐고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열쇠죠.

계명은 ‘이정표’이지, ‘쇠창살’이 아닙니다. 그러니 계명에는 ‘열쇠’가 있기마련이죠.


그런데 다함의 순간은 언제일까요.

나의 마음이 다하는 순간, 나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나의 뜻이 다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그 ‘다함’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나의 마음’이 다하고,

놓치면 끝이라고 여겼던 ‘나의 목숨’이 다하고,

이 때문에 산다 했던 ‘나의 뜻’이 다했습니다.

거기에 ‘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나의 마음을 다한 뒤에 ‘내 마음’은 남지 않죠.

나의 목숨을 다한 뒤에 ‘내 목숨’은 남지 않죠.

나의 뜻을 다한 뒤에 ‘내 뜻’은 남지 않죠.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내 마음, 내 목숨, 내 뜻을 안고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내 마음과 내 목숨, 내 뜻은 어김없이 하나님을 가리는 존재니까요.

그게 바로 에고의 마음, 에고의 목숨, 에고의 뜻이기 때문이죠.

둘째 가는 계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라’에 밑줄을 치죠. 그런데 ‘현문우답’은 ‘네 몸과 같이’란 대목에 방점을 찍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런 사랑은 이웃이 내 몸이 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다함의 순간’에선 가능하죠.
나의 마음, 나의 목숨, 나의 뜻이 다한 곳에 무엇이 남을까요. 거기엔 이웃만 남죠.
이웃의 마음, 이웃의 목숨, 이웃의 뜻만 남죠. 그 순간 ‘내 이웃=내 몸’이 됩니다.

그러니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둘이 아니죠.
첫째 계명이 풀리면 둘째 계명은 따라서 풀리죠.
그래서 ‘가장 큰 계명’은 ‘가장 큰 고개’가 됩니다. 그 너머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신에게 물어야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 나는 그걸 지킨 적이 있었던가’
‘나의 마음, 나의 목숨, 나의 뜻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내 이웃이 내 몸이 되는, 그런 온전한 순간이 내 삶에 있었던가’하고 말이죠.
“아니오!”라는 답이 나올 때 우리는 한 발 내딛게 되겠죠.
‘다함의 순간’을 향해서 말입니다.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8> 가장 큰 계명은 가장 큰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