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 얼마 전 어느 교회 목사님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질문이 나왔죠.
“목사님, 성령과 영성은 다른 건가요? 다르면 어떻게 다른 겁니까?”
목사님께선 “복잡한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신학적인 설명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모두가 공감하는 지점은 있었습니다.
우주와 바다가 하나인 것
‘에고’ 비우는 순간에 알아
‘성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뉘앙스, 영성은 내가 찾아가는 뉘앙스’. 대충 이런 뉘앙스였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죠. 그런데 뉘앙스는 단순히 뉘앙스에 그치질 않습니다.
‘성령이냐’‘영성이냐’에 따라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좇는 사람들은 위를 바라봅니다. 하늘을 봐야 하니까요.
반면 영성을 좇는 사람들은 아래를 봅니다. 가슴(내 안)을 봐야 하니까요.
과연 예수가 있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풍경2 : 어느 행자가 법사를 따라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향해 침을 뱉었죠.
법사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이 무슨 불경스런 짓인가. 행자가 버릇이 없구먼.”
그러자 행자가 말했습니다. “부처님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곳에 침을 뱉겠습니다.”
과연 부처가 있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풍경3 : ‘에고’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하나였죠. 바로 ‘우주’로 가는 겁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어떻게 공기도 없는 우주로 갈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죠.
그런데도 물고기는 늘 하늘만 바라봤습니다.
고요한 밤바다, 파도 위로 솟은 별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죠. 그 별을 볼 때마다 그리움은 더 커졌죠.
그 그리움이 너무 깊어 결국 ‘에고’ 물고기는 병이 났습니다.
의사 물고기가 말했죠. “우주에 가겠다는 꿈을 버리세요. 그 집착이 당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버티다 못한 ‘에고’ 물고기는 결국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였죠.
우주를 향해 썼던 편지, 옛날 성자 물고기들이 남긴 우주에 관한 글들, 아름다운 우주에 얽힌 개인적 추억을
모두 태웠습니다. 이를 악문 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죠.
그러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죠. 그건 바로 ‘에고’였습니다.
물고기는 직감했죠. ‘에고를 버리지 않고선 우주를 버릴 수 없겠구나.’
‘에고’물고기는 결국 ‘에고’를 버리기 시작했죠.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죠. ‘존재’를 던지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죽는다는 심정으로 ‘에고’를 버렸죠.
그러던 어느 날, ‘물고기의 앎’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물고기의 집, 물고기의 동네, 물고기의 바다도 ‘우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모든 형상이 그렇게 무너져 내렸죠.
그 순간 물고기가 말했습니다.
“어? 우주밖에 없네. 여기가 바로 우주네. 나의 집, 나의 동네, 나의 바다가 우주의 중심이었네.
뿐만 아니네. 나도 우주네. 우주가 나를 통해 숨을 쉬네.”
과연 우주가 있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방향성’의 문제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요.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삼라만상에 꽉 차있죠.
우주가 어디에 있나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죠.
그러나 하나님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우주도 없는 곳이 딱 한군데 있죠.
어딜까요. 바로 ‘에고의 마음’이죠. 에고의 영토에는 그게 없죠.
있다 해도 ‘내가 만든 부처’ ‘내가 그린 예수’ ‘내가 꿈꾸는 우주’만 있을 뿐이죠.
그러니 ‘성령’이든, ‘영성’이든 상관이 없죠. ‘에고’만 비우면 되죠.
그러니 ‘성령’이든, ‘영성’이든 상관이 없죠. ‘에고’만 비우면 되죠.
성령이라면 거기로 내려앉고, 영성이라면 거기로 차오르겠죠.
그럼 침을 어디에 뱉을까요. 그렇습니다. ‘에고’를 향해 뱉어야죠.
“네놈이 진리를 가리는구나”라며 말이죠.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