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항저우(杭州)의 영은사로 출장을 갔습니다. 규모도 꽤 큰 사찰이었죠.
법당 뒤 계단에는 ‘반야심경’의 전문이 약간 높은 돌벽에 새겨져 있더군요.
그런데 거기서 중국 사람들이 ‘폴짝폴짝’ 뜀뛰기를 하고 있었죠.
팔을 높이 쳐들고 뛰면서 글자를 한 자씩 손바닥으로 ‘탁!’ ‘탁!’ 치더군요.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궁금해서 가까이 갔죠. 알고 보니 흥미로운 풍경이더군요.
글자 짚으며 복 비는 중국인
‘부처’가리는 인간의 욕망
‘반야심경’은 불교 경전 중 가장 짧은 경전이죠. 모두 270자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이죠.
“불교의 팔만사천경이 모두 이 270자에 담겨 있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중국 불자들이 손바닥으로 치고 있는 글자는 참 뜻밖이더군요. 거기에는 ‘일관성’도 있었죠.
모두가 ‘得’(얻을 득), ‘多’(많을 다), ‘生’(살 생), ‘識’(알 식) 자 등을 짚더군요.
팔이 닿는 아래쪽의 글자 위에는 손을 올린 채 아예기도도 하더군요.
기도의 내용은 짐작이 갔죠. 돈을 벌고, 그것도 많이 벌고, 오래 살고, 많이 배워서,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를 무동 태운 채 그런 글자를 짚게 하더군요.
사실 이런 기도를 한다고 탓할 수만은 없겠죠. 그건 인간의 바람이니까요.
그런데 ‘반야심경’의 글귀를 짚으며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반야심경’이 기복을 위한 ‘부적’은 아니니까요.
신실한 불자라면 화를 낼만도 하죠. 그런데 안타까운 건 ‘농락당한 반야심경’이 아니더군요.
‘형상을 통해 본질을 보고, 본질을 통해 형상을 보라(색즉시공 공즉시색)’는 ‘반야심경’의 메시지 앞에서,
기복으로 점철된 강고한 ‘나’를 꺼내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안타깝기 짝이 없더군요.
지난해 이맘 때 고우 스님(전 각화사 태백선원장)을 찾아갔죠. 그리고 물었습니다.
“불교는 불(불상)·법(경전)·승(승려), 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디에 부처가 있습니까?”
고우 스님은 이렇게 답했죠.
“부처는 ‘불’에도 없고, ‘법’에도 없고, ‘승’에도 없습니다.
부처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의 자리에선 당연한 답이지만, 중생의 입장에선 파격적인 대답이죠.
이걸 기독교식 문법으로 풀면 이런 물음이 됩니다.
“십자가와 성경, 그리고 성직자.
과연 어디에 예수가 있습니까?”
답은 또 이렇게 되죠.
“예수는 십자가에도 없고, 성경에도 없고, 성직자에도 없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어떤가요. 이젠 그 ‘파격’이 피부에 감겨오나요.
결국 ‘마음’이죠. 예수가 살 곳도, 부처가 살 곳도 결국 ‘마음’이죠.
결국 ‘마음’이죠. 예수가 살 곳도, 부처가 살 곳도 결국 ‘마음’이죠.
그래서 ‘반야심경’을 짚으며 욕망을 키우는 중국 불자들의 마음이 더욱 안쓰럽더군요.
왜냐고요? 집착으로 점철된 ‘나의 마음’에선 부처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욕망으로 범벅된 ‘에고의 마음’으로는 예수의 마음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8절)”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에고의 마음이 ‘텅’ 비워질 때 ‘예수’를 만나고, ‘부처’를 만나게 되죠.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에고의 마음이 ‘텅’ 비워질 때 ‘예수’를 만나고, ‘부처’를 만나게 되죠.
그게 바로 기독교의 ‘영성 체험’이고, 불교의 ‘불성 체험’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