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1: 당나라 때 보화(普化) 스님이 신도들에게 말했죠. “누가 내게 옷 한 벌 시주하시오.” 그러자 신도들은 너나 없이 좋은 천으로 짠 옷을 가져왔습니다.
며칠 후 법당 구석에는 옷이 수북이 쌓였죠. 그런데 보화 스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내게 이런 옷은 필요가 없다. 다시 가져가라고 해라.” 그리고 벽을 향해 돌아앉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 허물면 온 우주가 한송이 꽃으로
소문이 퍼졌죠. 이 얘길 들은 임제(臨濟) 선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일렀죠.
“마을 목수에게 가서 관(棺)을 하나 짜도록 해라.”
며칠 후 임제 선사는 그 관을 보화 스님께 가져 갔죠.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 그대를 위해 새 옷을 한 벌 마련했소이다.”
그 말을 듣고 보화 스님은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고 했습니다.
# 풍경2: 경허 선사에겐 제자가 셋 있었죠. 수월과 혜월, 만공이었죠.
어느날 수월이 숭늉 그릇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공에게 물었죠.
“여보게, 만공. 이것을 숭늉 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마디로 똑바로 일러보소.”
이 말을 들은 만공 스님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수월 선사의 손에 있던 그릇을 낚아채 법당 밖에다 던져버렸습니다.
그걸 본 수월 선사는 “잘혔어, 참 잘혔어!”라고 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미를 매깁니다.
자식도, 동료도, 이웃도, 물건도, 나무도 ‘의미 매김’의 대상이죠.
그래서 시인은 ‘꽃’의 이름을 불렀겠죠. 그렇게 이름을 부른 순간, 꽃은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겠죠.
그런데 종교와 명상의 수행자들은 ‘꽃’을 찾지 않습니다. ‘꽃’의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내가 이미 불러버린 ‘꽃의 이름’을 샅샅이 찾아내죠.
그리고 꽃잎을 떨구 듯이 하나씩 내려놓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나의 ‘꽃’이 되기 전, 너는 누구였나.
내가 너의 ‘꽃’이 되기 전, 나는 누구였나.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때 너와 나는 누구였나. 그
몸짓조차 없었을 때 너와 나는 누구였나.”
수행자들은 그렇게 묻습니다. 만공 스님도 그랬겠죠. 수도 없이 물었겠죠.
눈에 보이는 그릇, 손에 만져지는 그릇, 숭늉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너는 분명한 그릇인데, 그 ‘그릇’ 이전에 너는 누구였나. 그걸 묻고, 묻고, 또 물었겠죠.
왜 그랬을까요. 눈에 보이는 형상, 손에 만져지는 형상, 감각으로 느껴지는 형상, 그 너머를 보기 위함이죠.
만공 스님은 그걸 본 뒤 다시 ‘꽃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건 장미도 아니고, 백합도 아니었죠. 수선화도 아니고, 들국화도 아니었죠.
다름 아닌 ‘세계일화(世界一花)’였죠. 그게 바로 ‘꽃 이전의 꽃’이기 때문이죠.
세상 모든 형상이 몸을 여읜 곳, 그곳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꽃.
그게 바로 ‘세계일화’라는 한 송이 꽃인 거죠.
그런데 그 꽃은 이전의 ‘꽃’과 다릅니다. 왜일까요. ‘오고 감’이 없기 때문이죠.
그 한 떨기 꽃이 온 우주에 꽉 차서 있기 때문이죠.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듯이 숨을 쉬면서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으로 한 송이 꽃만 있는 거죠.
그래서 만공 스님은 그릇을 내던진 거죠.
그릇이란 ‘이름’이 ‘이름 너머’를 가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나라 때 보화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깨친 이에게 육신은 하나의 옷에 불과하죠. 그걸 입어도, 그걸 벗어도 ‘꽃 이전의 꽃’은 오고감이 없으니까요. 그냥 있을 뿐이죠.
당시 보화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벗고, 관(棺)을 입은 거죠. 옷을 갈아 입듯이 말이죠.
그걸 임제 선사가 간파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물어야겠죠.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르기 전, 나는 과연 누구였나.”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