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기억나세요? 수학 시간에 ‘도형’을 배웠잖아요.
삼각형, 사각형, 마름모 등의 도형에 이런저런 공식을 외우곤 했죠.
그런데 도형의 시작이 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점’이더군요. 널따란 칠판에 ‘콕’하고 찍는 점 말입니다.
도형에 담긴 세상 이치
‘점’을 알면 ‘나’가 보여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유클리드는 기하학에서 ‘점은 위치는 있으나 크기는 없다’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저는 참 뜻밖이었어요. 그리고 놀랍더군요.
‘아하, 점은 위치만 있을 뿐 크기는 없구나!’
‘점은 위치만 있을 뿐 손에 만져지는 건 아니구나!’
어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도형’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숱하게 ‘점’을 찍죠.
‘너는 나의 아들’ ‘당신은 나의 남편’ ‘여기는 나의집’ ‘이것은 나의 미래’라며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고 하는 자아가 하나의 커다란 ‘점’이겠죠.
그런데 우리가 찍은 ‘점’에는 어김없이 ‘크기’가 생깁니다.
나의 집착이 클수록, 나의 욕망이 강할수록, 나의 미련이 짙을수록 그 ‘점’의 크기도 덩달아 커지죠.
그리고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점은 크기가 있다. 점은 만질 수 있다. 점은 클수록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을 가능한 크게, 가능한 짙게 찍습니다.‘꾸욱! 꾸욱! 꾸욱!’
며칠 전 ‘마음으로 배우는 교과서’를 낸
‘아름답고 푸른 지구를 위한 교육연구소(www.ibghome.net)’의 임소연(39) 소장을 만났습니다.
<중앙일보 6월12일자 21면> 그는 수학 교과서 『생명 수학의 공리』의 저자이기도 하죠.
임 소장은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을 ‘수학’으로 풀더군요.
임 소장은 “점은 크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바로 ‘나’라는 자아의 크기가 본래 없다는 얘기였죠.
“점은 크기도 없고, 무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꽝!’하고 박혀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그럼 ‘나’라는 점은 어떨까요.
“세상은 무한가능성의 마음이 창조한 도형입니다. 거기서 ‘나’는 점이 되죠.
그런데 그 ‘점’도 크기가 없습니다. ‘나’라는 자아의 크기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나’라는 ‘점’을 있는 것으로 봅니다.
크기도 있고 무게도 있는, 고정된 것으로 보고 말죠.”
임 소장은 그 이유도 꼽았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 자식에 대한 집착, 숱한 인간의 집착이 ‘점’을 고정된 것으로 만들죠.
그래서 ‘나’라는 자아가 그 ‘점’에 갇히고 마는 겁니다.”
놀랍더군요. 수학으로 ‘존재’를 푸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계속 물었습니다.
“그럼 ‘나’라는 ‘점’의 크기가 없음을 알면 어찌 됩니까?”
임 소장은 눈빛을 반짝였죠.
“점 스스로 ‘나는 박혀있지 않구나’를 깨치면 무한한 가능성이 생겨나죠.
이제 ‘점’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점’은 삼각형을 그릴 수도 있고, 사각형을 그릴 수도, 마름모나 동그란 원을 그릴 수도 있죠.
세상의 어떤 도형도 그릴 수가 있게 되죠.
그게 바로 ‘무한한 가능성의 마음’입니다.
그게 바로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입니다.”
임 소장은 ‘나’라는 점 속에 그게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도형도 창조할 수 있는 무한가능성이 ‘나’ 속에 있다는 얘기였죠.
“다만 ‘나’가 고정된 ‘점’일 때는 힘이 들죠. 그 점은 갇힌 점이 되니까요.
그래서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찍히지 않는 점이구나, ‘나’는 찍을 수 없는 점이구나.
그걸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참 재미있는 인터뷰였습니다.
참 재미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도형과 세상이 둘이 아니구나’‘나와 점이 둘이 아니구나’‘ 그 바탕에 깔린 마음마저 둘이 아니구나’ 싶었죠.
임 소장은 학생들에게도 그걸 가르칩니다.
학생들의 반응은 이렇다네요. “선생님, 수학이 재밌어요!”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